벼룩에 관한 유명한 얘기: 흔히 벼룩은 몇 미터씩(과장인가;;) 뛸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벼룩을 30Cm 높이의 실린더에 가두고 뚜껑을 닫으면 벼룩은 첨엔 계속 뚜껑에 부딪히며 더 높이 뛰려고 하지만 결국엔 30Cm 만큼만 뛴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훈련’한 벼룩을 60Cm 실린더에 옮겨도 벼룩은 여전히 30Cm 만큼만 뛸 뿐 그 이상 뛰지 않는다고 한다.
소논문(레포트가 요약보고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앞으로는 논문이라고 쓸까 한다, 이제껏 요약보고서를 써 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을 쓸 때 마다 항상 루인의 한계점을 만나길 기대하는 편이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현재의 루인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기에 소논문 숙제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런 소논문 쓰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단지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만나서가 아니라 이런 한계를 만남과 동시에 지금까지의 한계가 더 이상 한계가 아니게 되며 새로운 한계점을 설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이렇게 자신의 새로운 한계점과 만나는 과정이기에 글을 쓴 이후,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하다.
코끼리의 가죽끈 얘기나 벼룩 이야기를 쓴 건, 바로 이 한계라는 지점 때문이다. 한국의 제도화되고 정형화된 교육 틀과 루인을 ‘인정’하지 않는 이성애혈연가족제도에서 자랐기에 루인의 많은 부분들이 깎여 나갔거나 불가능한 기대로 여기게끔 배웠다. 하지만 이런 불가능성은 어떤 의미에선 두려움일 지도 모른다는 몸앓이를 종종 한다. 더 잘 할 수 있음에도, 다른 세상으로 횡단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서성이고 망설이는 이유는 “넌 할 수 없어” 혹은 “너 따위가 어떻게 그런 걸 해” 라는 식의 말들을 통해 생겨난 보이지 않은 벽이 주는 두려움은 아닐까 하는 몸앓이.
루인에게 한계점이 없음을 깨닫게 해 준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물론 여기서의 글쓰기는 소설이나 시가 아니라 소논문에 한정되겠지만(소설이나 시는 루인의 한계, 높은 벽을 선명하게 만난 계기이다). 그렇기에 루인에게 글을 쓴다는 행위는 루인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두려움의 벽들을 넘어서려는 행위이다.
비단 루인 뿐이랴. 글 쓰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