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지금의 무언가에서 도망치기 위해 빠져들었던 몰두가 새로운 중압감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부담스럽거나 하기 싫거나 미루고 싶어질 때, 다른 일에 빠져들곤 한다. 그것이 재밌기도 하겠지만 그렇기 보다는 마냥 그것에 빠져듦으로서 현재의 일에서 회피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빠져든 다른 일이 새로운 억압이 되고 회피하려한 일이 그리워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새로운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억압이 무거워 굴레에서 벗어나려 하고 회피하려한 일이 달콤하게 유혹한다.

짜부라질 것 같은 어떤 상태에서, 알지만 모른 척 하고 있다.

당신, 찬 가시야

당신을 기억해요. 기억하면 무엇 하겠느냐고 중얼거리면서도 떠오르지 않는 당신을 기억해요. 그러니 기억을 헤집어 본들 무엇 하겠어요. 실체는 없고 막연한 그리움만 그리고 있는 걸요.

토요일답지 않게 잠시 외출을 했어요. 이렇게 나갔다 왔다고 해서 별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 예요. 그냥, 바람이 많이 차서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에 짜증이 조금 났었나 봐요. 그러니 무심결에라도 당신을 떠올릴 시간은 없었어요.

요즘 쓰고 있는 글을 보며, 조금씩 두려워하고 있어요. 왜 이렇게 위험한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하고. 신랄함은 비판 받기 두려운 이의 행동이라고 했던가요.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날이 잔뜩 서 있는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자신의 몸이 말하는 언어를 듣고 쓰는 글이라지만 종종 그런 몸앓이들이 지나치게 날을 세우고 있다면, 스스로도 치치기 마련이죠. 소통을 막고 싶어 하는 몸이 지금을 채우고 있어서 일까요? 아니면 소통을 바라면서도 그 ‘피곤함’이 자기방어를 하고 있는 걸까요? 알 수 없지만, 이런 알 수 없음은 알고 싶지 않음과 얼마나 차이가 날런지.

당신이 있는 곳엔 바람이 부는지 궁금했어요. 이런 궁금함도 일시적인 스침이지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러고 보면 루인 역시 무관심 속에 둘러 쌓여있다는 몸앓이가 외출 중에 들었어요. 이 “무관심”은 흔히 말하는 그런 무관심과는 의미와 맥락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요. 그럼에도 루인이란 사람이 참, 무관심 속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몸의 반응을 느꼈어요. 스스로 만든 일이니 그 누구에게 말 하겠어요. 그저 이렇게 중얼거리며 제 삶의 한 단면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따름이죠.

따지고 보면, 소통이라는 일도, 참 피곤한 일이예요. 자신을 돌볼 여력마저 없을 땐,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가 참 힘들어요. 그래서 자기애는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예요. 스스로를 사랑할 때 에야만 비로소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으니까요. 일방적인/강제적인 희생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마련이죠.

요즘 쓰고 있는 글들에 날이 가득한 모습을 보며, 무엇이 이토록 스스로들 지치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무엇이 두려웠기에 이토록 신랄하게 말하고 싶어 한 걸까…

그래서 당신을 가만히 불렀어요. 당신, 하고. 이렇게라도 당신을 다시 불러들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다독일 수 없겠구나, 했거든요. 그러니 화내지는 말아주세요. 아직도 이렇게 살고 있다고 혹은 당신을 이용했다고… 그저, 당신이란 이름이 너무 좋은 걸요.

죄송해요.

또 다른 불륜 현장

(제목이 참, ‘선정적’이다-_-;;)

일테면 1980년대에 쓴 글들을 지금에 와서 아무런 유효성이 없다곤 몸앓지 않는다. 대략 20년가량의 세월이 흘렀기에 세상은 많이도 변했고 학문도 그 만큼의 변화를 겪었다. 그렇기에 70, 80년대의 텍스트들을 읽는 일이 낡은 일이고 별다른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 일일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때론 요즘 나오는 텍스트들 보다 더 멋지고 빼어난 성찰을 보여주는 텍스트들은 얼마든지 있다. 일테면 루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벨 훅스bell hooks의 1981년에 나온 [Ain’t I A Woman]이나 1984년에 나온 [Feminist Theory]와 같은 책은 지금 나오는 어떤 책들보다 몸 아프게 하는 통찰과 성찰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종종 수업시간에 80년대 출판된 텍스트들을 읽게 하는 것은,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다. 비록 그 텍스트들이 그 당시엔 상당히 중요하고 유효한 성찰을 보여주었다 해도 그것이 현재에도 유효한가엔 회의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논의의 내용과 깊이는 많이도 변했고 그래서 그 시절 나온 글 중엔 더 이상 그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고전강독과 같은 경우, 혹은 ‘체계’적인 배움 등의 이유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지만 텍스트들의 수명은 다 다르기 마련이고 어떤 텍스트는, 정말이지 시간낭비란 불만만 나오게 한다.

수업을 듣다 보면 선생님이 배웠던 시절의 지식에서 조금도 더 나아가지 않은 상태로 수업을 하는 경우가 있다. 때로 길게는 2, 3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당시의 텍스트와 지식으로 수업 시간에 강의를 하고 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곤 하는 경우를 보곤 한다. 수업을 듣는 입장에선 이보다 화가 나는 일이 없다. 앞서 80년대 텍스트에 대해 궁시렁 거린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 수업 시간에 커리로 그 당시의 텍스트를 읽게 했다. 이런 사실 자체엔 별다른 불만이 없다. 1940년도에 나온 글도 수업 시간을 통해 읽었는데 80년대에 논의된 글 정도야(페미니즘/여성학에서 1940년대면 정말 ‘오래’된 시간이다). 문제는 이 텍스트들의 고전 이상으로서의 유효성과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하는 논의의 정도 등에서 발생했다.

오래된 논의라고 낡은 것이 아니며 최신 이론이라고 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행담론을 좇아가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다) 예전에 배운 지식에 안주하여 지금 논의가 어떤 식으로 바뀌고 있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거나 모른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특히 페미니즘 관련 수업 시간의 경우, 담론은 항상 움직이고 있고 그렇기에 현재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핵심은 수업에 들어오는 교수/강사의 태도가 문제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니까 와~ 하고 따라가고 탈식민주의가 유행하니까 와~ 하고 따라가는 것도 문제지만, 끊임없는 새로운 배움 없이 자신이 대학원 시절 배웠을 법한 지식으로 아직도 강단에 서 있다면 그것은 학생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윤리가 아니다. 과거의 배움을 아직까지 울궈먹는 행위는 자신의 지식에 회의하지 않는 태도이며 앎에 민감하지 않은, 변태하지 않는 삶이라고 본다.

불륜이 별게 아니다. 관계에서의 윤리가 아닌 것, 그것이 불륜不倫이다. 새로운 앎으로 나아가지 않고 과거의 자신에 안주하고 있으면서 강단에 선다면 그것이야 말로 학생들에 대한 불륜이 아니고 무엇일까.

*혹시나 해서 말하면 이 글, 특정한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니 오해는 말아줘요. (왠지 이 말이 더 이상하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