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엔 물이 새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어두운 玄牝에 머물며 나가길 머뭇거렸다. 비가 내리는 만큼 우물의 깊이가 더해갔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오전부터 부천에 갈 일이 있어서 이다. 몇 주 전, 약속한 일이다. 하지만 사실상 그 일은 별다른 수확이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갔어도 가지 않았어도 그만일 일이었다. 옷만 흠뻑 젖었다.

흠뻑 젖은 옷이 싫다. 발이 불어가고 옷은 무거워지고 바람에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눈을 감고 귀를 막고, 표정을 지운다.

부엌에선 여전히 물이 새고 있다. 비만 오면 물이 샌다. 새는 물이 몸에 쌓여가고 고여 가는 물이 썩어간다. 썩어가는 물 냄새가 몸에 인처럼 박혀, 역하다.

물에 젖어가는 玄牝과 닮아가는 몸. 물에 젖은 몸이 어둡다.

왜 공부/연구를 하는가 (혹은 어떻게 공부를 하는가)

며칠 전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던진 질문이다. 왜 공부 혹은 연구를 하는가.

수업시간에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루인에겐 어느 정도 선명한 편이다. 왜 공부를 하느냐면 루인의 경험/삶을 읽고 싶기 때문이다. 그 외의 별다른 ‘욕심’은 없는 편이다.

어릴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루인의 관심은 루인이고 그래서 루인의 경험을 읽는데 우선적인 관심이 있었다. 고리타분하고 말장난 같은 이론 따위 루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 이론이 전 세계적인 유행이라고 해도 그것이 루인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면 하나의 자극제는 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까지 대단하게 보이지도 않았고 애써 배워야겠다는 몸앓이도 들지 않았다.

항상 이 몸앓이가 우선시 되고 그 이후 어떤 텍스트들을 찾는 순서로 이루어 졌다, 루인이 공부하는 방식은. 그러니까, (텍스트와 관련한) 루인의 경험을 앓고 루인의 위치positioning를 어느 정도 읽은 후에야 논문 등의 글들을 읽었다. 그러길 선호하는 건, 과거, 이런 글들에 의해 루인의 경험을 읽는데 실패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앎과 삶을 같이 읽기 보다는(요즘은 앎과 삶이 분리될 수 없다고, 이론과 경험을 분리해서 몸앓을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그건 이론에서나 가능하지”라는 언설이 불편하고 감정 없는 이론을 위험스럽게 받아들인다) 지식 자랑에 급급했기에 루인의 경험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지식으로 루인의 경험이 설명되지 않으면 루인의 삶이 이상한 것이지 그 이론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다.

아직도 이런 경험에 대한 걱정이 남아서 인지, 어떤 텍스트를 읽으려고 작정을 하면 그 전에 그 텍스트와 관련된 경험을 먼저 읽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 편이다. 그럴 때 텍스트와 루인의 경합, 이동mapping 등이 더 즐겁게 발생했다. 텍스트 내용을 파악하려고 급급할 땐 지루하거나 재미가 없었다.

이랑 세미나의 다음 커리를 정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주제는 이반queer. 하지만 루인 역시 관련 커리를 읽은 것이 별로 없다. 현재 루인의 작업은 텍스트 읽기가 아니라 루인의 삶을 읽는 작업 중이기 때문이다. 물론 몇 개의 텍스트를 읽고 있긴 한데, 세미나로 같이 쓰기엔 좀 애매한 구석이 있는 텍스트들이다. 이래저래 고민이다.

우주인/외계인

우주인이나 외계인이나 거의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데, 만약 우주인이나 외계인이 스필버그식으로 E.T.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두 단어는 서구 근대적 이상을 정확하게 재현한다.

우주인이란 말은 지구는 우주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외계인이란 말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범세계적인 공간이라는 의미를 전제한다.

즉, 통상 우주인에 지구인은 포함되지 않기에 지구는 우주 밖, 어딘가에 위치한다는 의미이고(가장 탈육화된disembodiment 사유로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와 같다) 외계인이 우주인과 같이 지구 밖에서 온 사람을 의미하기 위해선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세계의 기준이라는 인식(제국주의적 시각에서의 바로 그 인식)에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