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히히..청강 중단

아침, 샤워를 하려고 화장실에 갔다가, 결심했다. 지금 듣고 있는 대학원 수업 청강을 그만하기로.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다. 수업을 통해 뭔가 자극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소통이 잘 되어 신나는 공간인 것도 아닌, 때로 답답함과 약간의 분노로 우울해지는 곳이라면 더 이상 들어 무엇 할까 하는 결론. 더군다나 청강생인데 몸의 거부반응을 억누르고서 까지 들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결정하고 나자 너무도 시원해졌다. 우후후.

그러고 나서 신나게 읽겠다고 꺼내든 책은? 냐하하, [813]이다. 뤼팽시리즈. 흐흐흐. 그냥 소설을 통해 비워내고 싶다는 몸부림의 반응이랄까. 그렇다고 뤼팽시리즈가 가벼운 추리소설이라곤 보지 않는다. 이 책, 의외로 흥미로운 텍스트인데, 1900년대 초반, 여권운동이 한창이고 ‘여성’들에게 재산권과 참정권이 ‘부여’되면서 이에 대한 주류 ‘남성’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했는지를 잘 드러낸다.

암튼, 이런저런 부담감이 사라지자 동영상들도 평소 보다 더 신나게 보게 된다. 후후후. (그나저나 지금 보는 동영상, 상당히 흥미롭다. 언젠가 분석하고 싶을 정도로. 채식주의를 섹스-젠더-섹슈얼리티와 연결시켜 이렇게 흥미롭게 재현한 작품이 있을까 싶을 정도.)

자주 떠올리는 글

루인이 이랑에 쓴 글 중에 ‘자주’ 떠올리는 글은 “‘지나친’ 미안함“이란 글이다. 이 글이 잘 썼다는 말이 아니라 루인의 갈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테면 페미니즘과 같은 집단에서 ‘정치적 소수자’가 권력을 가지고 ‘정치적 소수자’의 언설에 다른 사람들이 침묵하는 상황을 루인은 끔찍하게도 싫어한다. 침묵 자체가 이미 ‘정치적 올바름’이란 판타지/폭력의 실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소수자’의 발언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도 절대적으로 정확한 이론이나 말을 할 수 있다고 몸앓지 않는다(그것 자체가 환상이다). 다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언어를 말 할 수 있을 뿐이다. ‘장애’인 ‘문제’에 대해 비장애인이 말하는 것이, 아프리칸-아메리칸 ‘문제’에 대해 백인이 말하는 것이, 비이성애자의 고통에 대해 ‘이성애’자가 말하는 것이 무조건 문제가 있다고 몸앓지 않는다. 물론 기존의 특정한 누군가(일테면 미국 중산층 ‘이성애자’ 비’장애’인 백인 ‘남성’)의 말만이 권력을 가진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소수자’의 언어만이 권력을 가지는 것도 문제다. 일테면 ‘게이’문학(‘게이’문학이란 말 자체가 문제적이지만 여기선, 그런 것이 있다고 치고-_-;;)에 대해 ‘이성애’자는 침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위치를 통해 독해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좋다고 믿는다. ‘게이’문학에 대한 ‘이성애’자의 해석, ‘레즈비언’의 해석, ‘게이’의 해석, ‘장애’인 비/’이성애’자의 해석 등등 무수하게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각자의 위치에서 말할 때에야 서로의 다른 위치들이 각자 어떤 식으로 읽고 있는지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가해) 상황에 대해, 마냥 죄송함을 표현하기 보다는 어째서 그런 언설을 했는지 말하고 피해 경험자는 왜 그것이 폭력인지 말할 수 있길 바란다. 피해 경험자가 “그건 폭력이야”라고 했을 때, 마냥 죄송하다는 말만 한다면 그건 피해 경험자를 (그리고 피해 상황을) 더 외롭게 만드는 일이다.

자기 공포/혐오의 이면

요즘 들어 자주 하는 말이 자기공포/혐오self-phobia이다. 물론 어디 가서 하는 말은 아니고 이곳과 루인이 루인에게 말을 걸 때 하는 말이지만.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느끼는 격렬한 금기의 감정, 두려움, 공포 등이 바로 사회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라고 요즘 들어 몸앓고 있다. 뭐, 특별할 것 없지만 그 만큼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랄까.

이런 자기공포/혐오의 감정이 바로 이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rule이며 현재 사회와 별다른 갈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알지 못할, 하지만 대다수가 내면화 하고 있는 작동 이데올로기다. 그래서 자기공포/혐오는 이 사회를 읽는 중요한 텍스트/거울이라고 몸앓는다.

이런 텍스트/거울을 읽어내는 것, 그 과정들이 삶과 앎이 교직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순간들이 아프지만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