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는 것

#굳이 트랙백이 있다면 이 곳이겠지만 블로그가 아닌 관계로 트랙백이 없을 수도 있는..

요즘 들어 부쩍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음의 권력에 대해 몸앓고 있다. “난 그거 몰라”, “언제 저런 일이 있었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좀 설명해주시겠어요”라는 말들이 가지는 권력. 물론 이렇게 모른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말하면서도 당당하거나 모름에 대해 별 문제를 못 느끼는 지점이 문제이지만.

정희진 선생님은 성매매로 설명했지만 루인은 이반queer/비이성애 ‘문제’로 너무도 자주 겪고 있다. 잘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 이득이거나 몰라도 되고 모른다고 말해도 상관없는 맥락에서 가능하며 그런 것은 (꼭 그렇지는 않지만) 보통 ‘정치적 소수자’의 문제에서 발생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모른다고 해서 부끄러워하는 사람 별로 없고, 퀴어에 대해 모른다고, 성매매에 대해 모른다고 말해도 부끄러워하는 사람 (거의) 없다. 오히려 모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루인에게, 혹은 굳이 루인에게가 아니어도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라는 말을 붙이며 질문하는 사람을 볼 때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력 혹은 특권에 대해 몸앓는다. “전 이성애자라서 잘 모르겠는데요, 동성애는..” 운운 하는 질문들(그럼 도대체 ‘이성애’는 뭔데? 사실 더 모르는 것은 비이성애가 아니라 이성애다), “트랜스젠더가 뭐죠?”라는 식의 질문들 모두 자신의 권력/특권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일테면, 황우석씨 앞에서 “제가 유전공학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라거나 정신분석학 학회 같은 곳에서 “제가 라깡을 몰라서 그러는데요” 운운하는 질문을 그렇게까지 당당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미리 공부하지 않았음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를 망설이기 마련이다.

결국 자신이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 모르면서도 모른다고 당당하게 혹은 별 망설임 없이 드러낼 수 있음 자체가 이미 사회적인 권력 작동 내에서 가능한 행위이다. 지식의 위계가 발생하고 이런 위계 속에서 모른다고 말하면 부끄러운 영역과 모른다고 자랑스럽게 말 할 수 있거나 모른다고 해서 별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영역이 구분’되는’ 것이다. 이반/비이성애에 대해 철저히 비가시화 하는 한국 사회에선 이런 ‘정치적 소수자’ 문제를 모르도록 작동하고 모른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라는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마다 불편하다. 그 문제가 그 사람에겐 별다른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거나 고민하지 않아도 별 상관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 보다는 그 사람이 가지는 그 태도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런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선 차라리 이렇게 묻고 소통하려는 자세가 소중한데(어떤 의미에선 이런 질문이 상처가 되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한정한 것),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며 편견/폭력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 보다는 소통하려는 자세는 모르는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변화는 질문하는 사람과 답변을 하는 사람 모두에게 발생한다.)

때론 부담스럽다

민우회 여성주의 학교-간다 강의를 들으며, 지난주엔 카페에 후기를 올렸다. 기획하신 분들이 농반진반으로 올리라고 해서 올렸던 것이다. 이번 주엔, 우연히(하지만 아무리 봐도 ‘음모’-_-;; 같은데) 루인이 후기를 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 글을 썼고(바로 아래 글) 카페에 올릴까 하다가, 뭔가 망설여져 오늘 올리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 올리지 않기로 했다.

지금에 와서 루인이 가장 편하게 글을 올릴 수 있는 곳은 이곳, [Run To 루인]과 이랑블로그이다. 이랑블로그도 사실, 처음으로 “제멋대로칼럼”을 쓸 땐, 너무 부담스러워서 며칠씩 고심했다. 몇 달이 지나고 좀 익숙해졌기에 편한 것이지. 하지만 강의 카페에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곳에 쓰는 글과 그곳에 쓰는 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곳에 쓴다면 이곳의 지속적인 맥락이 있고, 이곳에 오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런 맥락에서 읽을 거란 믿음/환상이 있기에 루인 멋대로 쓸 수 있지만 카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다들 낯선 사람들이고 루인이 가지는 위치와 아직은 소통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기에 무작정 이곳의 글쓰기를 그대로 그곳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루인이 쓰는 언어가 낯설 경우, 상당한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신경 쓰이기 마련.

물론 이곳에 쓴 글을 그대로 옮겨 담을 수도 있지만 내키지 않는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복잡한 감정인데, 아무튼 도저히 이곳의 글을 그대로 그곳에 쓸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아무튼, 결론은 낯선 곳에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민우회 여성주의 학교-간다 2강 후기

(라고 제목을 적으니 뭔가 거창해 보여서 불편하지만, 언젠가부터 제목을 좀 선명하게 적지 않으면 나중에 찾기가 힘들다는 스스로의 불편함에…)

*이 글은 논의를 단순화시키기 위해 젠더-섹슈얼리티gender-sexuality 관점에서 썼기에 많은 문제가 있어요.

강의는 물론 좋았다. (루인에게 이 “좋았다”는 말이 좀 논쟁적이고 다중적인 의미이긴 하다-_-;; 지금의 좋았다는 말은 신났다는 말과 비슷할 듯.) 일테면 내공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의외의 충격은 질의응답 시간이었는데 그때 나왔던 질문 중 어떤 것은 이반포비아queer-phobia 수준이었다. 그 질문(?)을 들으며 루인은 머리카락을 뜯고 있었지만 강사(흔히 강사선생님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이는 상당히 계급적인 표현이다, 청소부선생님이라곤 안 한다)의 답변은 존경스러울 정도로 멋졌다.

또 다른 질문, “양성애는 과도기적인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좀 충격이었는데, 강의를 듣는다는 것과 그것을 몸으로 읽고 자신의 위치를 이동한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양성애가 과도기적”이라는 말은 결국 ‘이성애’와 ‘동성애’가 있고, 이 두 가지 성애만이 ‘정상’이며 ‘양성애’는 이 둘 중 어느 하나로 가야하는 ‘비정상’이라는 의미이다. (어제 강의에서도 지적되었지만 그와는 좀 다른 지점에서 ‘이성애’, ‘동성애’와 같은 말 모두 논쟁적이고 문제적이다.)

재미있었던 것은, 강의가 끝나고 벌집토론(테이블별로 앉아 있는 사람들끼리의 토론) 시간에 나온 의견 중 하나이다. 사실 이 의견은 특별할 것 없는 너무 자주 들어온 말이며 동시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쉽게’ 수긍하는 말이다. 그래서 불편했고 조금 아프기도 했다.

논쟁은 butch-femme 이었다. 그러니까 ‘레즈비언’ 내에서 ‘분류”되는’ butch-femme이라는 두 가지 ‘역할’이 결국 기존의 성역할과 같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랑에서도 이와 관련한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Butch가 남성적인 역할을, femme이 여성적인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권력관계가 이성애적 관계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문제. (루인도 예전엔 이렇게 몸앓았더랜다.)

사실 이 말을 듣고 화가 좀 많이 났었다. 루인식 언어로 보면 젠더환원론의 또 다른 표현방식인데, 어떤 의미에선 가장 폭력적일 수 있는 시선의 한 전형이다.

우선적으로 묻고 싶은 것은 butch와 femme이라고 말할 때의 그 butch와 femme은 도대체 누구냐는 것이다. 물론 루인이라고 butch와 femme이라는 ‘성격’이 없다고 몸앓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butch처럼 보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femme처럼 보일 수도 있다(핵심은 “보일 수 있다”는 것). 문제는 이런 ‘성격’을 “쟤는 남자처럼 행동 하네” 혹은 “쟤는 여자처럼 행동 하네” 식으로 구분하고 butch는 남자역할, femme는 여자역할이라고 환원/명명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것은 누구의 시선이냐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 자체가 이미 이성애gender적인 시각이며 ‘이성애’와는 다른 맥락에 있는 ‘동성애’/’레즈비언’을 ‘이성애’로 환원해서 재단하는 방식/폭력이다.

또 다른 문제는 정말 그렇게 “butch-femme 역할”을 하는 커플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이런 ‘역할’이 ‘이성애’에서의 그것과 같으니까 이성애와 별로 다를 것 없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동성애’에서의 성역할sexuality role/rule을 ‘이성애’에서의 성역할gender rule과 같은 맥락으로 환원시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Ftm(female to male)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이성애’ 정체성을 가진 ‘남성’과 연애를 할 때, 외부의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볼 땐 이성애연애각본에 충실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ftm 정체성을 가진 이의 ‘목적’ 중 하나는 젠더사회에서 남성이라는 역할을 배우기 위한 것이다(‘이성애’적 ‘남성’이 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럴 때, 과연 ftm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연애 행위를 “너도 별 수 없이 이성애적이구나”라고 말 할 수 있을까.

흔히 ‘게이’ ‘남성’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말해지지만 ftm정체성의 사람들은 종종 ‘게이’ ‘남성’이야 말로 가장 “남자답다”고 말한다.

이처럼 개인의 정체성이 가지는 맥락/위치에 따라 의미는 달라지는데 ‘레즈비언’ 내에서의 “butch-femme”이라는 역할을 ‘이성애’에서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며칠 전 쓴 글에서도 적었듯이 위치가 달라지면 의미가 전혀 다르게 작동하는데 ‘레즈비언’ 내어서도 “butch-femme 역할”이 있으니까 ‘이성애’적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탈맥락화 시켜 자신의 입장으로 환원해서 보겠다는 폭력이라고 몸앓는다.

..이런저런 몸앓이를 했다. 그러며 며칠 전, 한 수업 시간에 있었던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은 공포phobia'(일테면 “나도 페미니즘에 동의해요, 하지만 페미니즘에서도..” 운운하며 은근히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것)와 한채윤씨가 예전에 썼던 글의 “우아한 호모포비아”란 말을 떠올렸다. 어떤 의미에선 노골적인 포비아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런 “우아한 포비아”다. 그렇다고 같이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이반포비아가 있다고 믿진 않지만, 가끔씩 드러나는 어떤 장면들에선, 아픔을 느낄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