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떠올리는 글

루인이 이랑에 쓴 글 중에 ‘자주’ 떠올리는 글은 “‘지나친’ 미안함“이란 글이다. 이 글이 잘 썼다는 말이 아니라 루인의 갈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테면 페미니즘과 같은 집단에서 ‘정치적 소수자’가 권력을 가지고 ‘정치적 소수자’의 언설에 다른 사람들이 침묵하는 상황을 루인은 끔찍하게도 싫어한다. 침묵 자체가 이미 ‘정치적 올바름’이란 판타지/폭력의 실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소수자’의 발언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도 절대적으로 정확한 이론이나 말을 할 수 있다고 몸앓지 않는다(그것 자체가 환상이다). 다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언어를 말 할 수 있을 뿐이다. ‘장애’인 ‘문제’에 대해 비장애인이 말하는 것이, 아프리칸-아메리칸 ‘문제’에 대해 백인이 말하는 것이, 비이성애자의 고통에 대해 ‘이성애’자가 말하는 것이 무조건 문제가 있다고 몸앓지 않는다. 물론 기존의 특정한 누군가(일테면 미국 중산층 ‘이성애자’ 비’장애’인 백인 ‘남성’)의 말만이 권력을 가진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소수자’의 언어만이 권력을 가지는 것도 문제다. 일테면 ‘게이’문학(‘게이’문학이란 말 자체가 문제적이지만 여기선, 그런 것이 있다고 치고-_-;;)에 대해 ‘이성애’자는 침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위치를 통해 독해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좋다고 믿는다. ‘게이’문학에 대한 ‘이성애’자의 해석, ‘레즈비언’의 해석, ‘게이’의 해석, ‘장애’인 비/’이성애’자의 해석 등등 무수하게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각자의 위치에서 말할 때에야 서로의 다른 위치들이 각자 어떤 식으로 읽고 있는지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가해) 상황에 대해, 마냥 죄송함을 표현하기 보다는 어째서 그런 언설을 했는지 말하고 피해 경험자는 왜 그것이 폭력인지 말할 수 있길 바란다. 피해 경험자가 “그건 폭력이야”라고 했을 때, 마냥 죄송하다는 말만 한다면 그건 피해 경험자를 (그리고 피해 상황을) 더 외롭게 만드는 일이다.

자기 공포/혐오의 이면

요즘 들어 자주 하는 말이 자기공포/혐오self-phobia이다. 물론 어디 가서 하는 말은 아니고 이곳과 루인이 루인에게 말을 걸 때 하는 말이지만.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느끼는 격렬한 금기의 감정, 두려움, 공포 등이 바로 사회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라고 요즘 들어 몸앓고 있다. 뭐, 특별할 것 없지만 그 만큼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랄까.

이런 자기공포/혐오의 감정이 바로 이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rule이며 현재 사회와 별다른 갈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알지 못할, 하지만 대다수가 내면화 하고 있는 작동 이데올로기다. 그래서 자기공포/혐오는 이 사회를 읽는 중요한 텍스트/거울이라고 몸앓는다.

이런 텍스트/거울을 읽어내는 것, 그 과정들이 삶과 앎이 교직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순간들이 아프지만 신난다.

모른다는 것

#굳이 트랙백이 있다면 이 곳이겠지만 블로그가 아닌 관계로 트랙백이 없을 수도 있는..

요즘 들어 부쩍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음의 권력에 대해 몸앓고 있다. “난 그거 몰라”, “언제 저런 일이 있었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좀 설명해주시겠어요”라는 말들이 가지는 권력. 물론 이렇게 모른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말하면서도 당당하거나 모름에 대해 별 문제를 못 느끼는 지점이 문제이지만.

정희진 선생님은 성매매로 설명했지만 루인은 이반queer/비이성애 ‘문제’로 너무도 자주 겪고 있다. 잘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 이득이거나 몰라도 되고 모른다고 말해도 상관없는 맥락에서 가능하며 그런 것은 (꼭 그렇지는 않지만) 보통 ‘정치적 소수자’의 문제에서 발생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모른다고 해서 부끄러워하는 사람 별로 없고, 퀴어에 대해 모른다고, 성매매에 대해 모른다고 말해도 부끄러워하는 사람 (거의) 없다. 오히려 모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루인에게, 혹은 굳이 루인에게가 아니어도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라는 말을 붙이며 질문하는 사람을 볼 때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력 혹은 특권에 대해 몸앓는다. “전 이성애자라서 잘 모르겠는데요, 동성애는..” 운운 하는 질문들(그럼 도대체 ‘이성애’는 뭔데? 사실 더 모르는 것은 비이성애가 아니라 이성애다), “트랜스젠더가 뭐죠?”라는 식의 질문들 모두 자신의 권력/특권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일테면, 황우석씨 앞에서 “제가 유전공학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라거나 정신분석학 학회 같은 곳에서 “제가 라깡을 몰라서 그러는데요” 운운하는 질문을 그렇게까지 당당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미리 공부하지 않았음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를 망설이기 마련이다.

결국 자신이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 모르면서도 모른다고 당당하게 혹은 별 망설임 없이 드러낼 수 있음 자체가 이미 사회적인 권력 작동 내에서 가능한 행위이다. 지식의 위계가 발생하고 이런 위계 속에서 모른다고 말하면 부끄러운 영역과 모른다고 자랑스럽게 말 할 수 있거나 모른다고 해서 별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영역이 구분’되는’ 것이다. 이반/비이성애에 대해 철저히 비가시화 하는 한국 사회에선 이런 ‘정치적 소수자’ 문제를 모르도록 작동하고 모른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라는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마다 불편하다. 그 문제가 그 사람에겐 별다른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거나 고민하지 않아도 별 상관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 보다는 그 사람이 가지는 그 태도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런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선 차라리 이렇게 묻고 소통하려는 자세가 소중한데(어떤 의미에선 이런 질문이 상처가 되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한정한 것),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며 편견/폭력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 보다는 소통하려는 자세는 모르는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변화는 질문하는 사람과 답변을 하는 사람 모두에게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