냥이

며칠 전, 추석이 끝나고 玄牝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玄牝은 어느 빌라의 가장 윗 층이고 문 앞엔 신발장이 있다.) 계단을 올라오는 길에 아래 층 문 앞에 놓여 있는 박스와 부딪쳤는데, 순식간에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반 층 위로 올라간 무언가는, 고양이였다.

아래층에서 기르는 고양이는 아니었다. 밖을 돌아다니는 고양이가 잠시 피해온 것인 듯 했다. 너무 좋았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상당한 경계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유리를 부딪치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玄牝으로 돌아왔다가 잠시 밖으로 나가보니 한 곳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잠시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니 다시 경기를 일으킬 듯이 밖으로 나가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그날 늦은 밤과 새벽, 고양이 울음을 들으며 가끔 잠에서 깨곤 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데(이랑 매체 작업으로 늦게 돌아왔다) 신발장 뒤로 뭔가가 들어가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잘못 본 것인가 하고 말았다. 헌데 시간이 지나자 고양이 울음이 들려왔다. 살짝 문을 열자 두 마리의 아기 고양이(전 날 본 고양이와 또 다른 한 마리)가 서둘러 신발장 뒤로 들어갔다. 그 날도 늦은 밤, 새벽 고양이 울음을 들으며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러고 보면, 꽤나 오랫동안 새벽마다 고양이 울음으로 잠에서 깨어났던 일이 떠올랐다. 그땐 어느 집, 아기가 우나 보다 했다. 고양이 울음과 아기 울음은 닮아있으니까. 그렇다면 그 아기 고양이는 태어날 때부터 이곳에서 살았단 걸까?

아무튼, 두 마리의 고양이가 신발장 뒤에 살고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설레었다. 오랫동안 함께 살 생명을 바랬기에. 그럼에도 여태껏 그러지 않고 있는 건 동물(비인간non-human)들에겐 자신들이 함께 살 공간에 대한 선택권이 없기 때문이다. 반려동물, 혹은 사람이 동물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동물이 사람을 ‘키우는’ 것이라곤 해도 동물들에게 자신의 원하는 환경, 동반자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라는 입장이기에 그냥 함께 살고 싶다는 욕망만 품고 있다. 그런데 두 마리의 냥이가 루인의 玄牝에 자리 잡고 살고 있는 것이다!

으하하, 두근두근, 설레는 맘으로 어떻게 ‘유혹’할까, 부터 생활비는 어떻게 나눠 쓸까, 까지 별의별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더 이상 냥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주인집에서 발견하고 쫓아냈을 수도 있고 냥이들이 다른 공간을 찾아 나간 것일 수도 있다.

아쉬움이 크다. 함께 살고 싶어서, “우린 운명이야”라는 기대까지 가졌는데.

욕망/결핍

어느 수업에선가 욕망이란 건, 결핍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배웠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몸앓이를 하고 있다.

욕망이란 건, 몸 어딘가에서 몸을 타고 돌아다니는 무엇이라는 몸앓이. 결핍이 아니라 결핍과는 상관없이 발생하기도 하는(혹은 결핍과는 전혀 무관한).

그런 어떤 욕망과 종종 놀곤 한다. 몸을 타고 돌아다니는, 결핍도 아닌데 발생하고 있는. 그 욕망은 행해질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하고 행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건, 행해질 수 있는 욕망을 유예한다는 것. 정신분석에선 유예의 쾌락(?)이라고 말했던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당장 행해질 수 있는 어떤 욕망을 행하지 않고 몸을 타고 놀도록 두곤 한다. (타고 노는 것은 누구이며 내버려 두는 것은 누구인가.) 행해질 수 있는 욕망과 유예하는 욕망(들). 유예하는 욕망을 즐기거나, 이런 욕망들이 몸에서 서로 경합하는 그 순간을 즐기고 있을 때, 욕망은 결핍과 관련 있는 것일까. 결핍과는 별도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욕망을 결핍으로 보려는 시선 자체가 어쩌면 계급 우월주의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욕망 자체가 죄악시되었던 시대가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더욱더.

또한, 타고 노는 욕망은 누구이며 유예하는 욕망은 누구인가, 라는 식의 질문 자체가 근대 이분법(monolithic)의 반복이다. 욕망을 접근하는 방식이 문제이다. 유예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욕망임을 감안할 때, “행하는”, “유예하는” 식의 구분은 욕망을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거나 ‘나’와 욕망을 분리시키려는 것이다.

욕망 자체가 (또 하나의) 나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玄牝에서 뒹굴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르렀다.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