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싶어 지다

친구의 연극 공연이 있어 보고 왔다. 이번엔 무대엔 올라가지 않고 의상을 담당했다고 한다. 작년엔 직접 대본을 썼고 올 봄엔 대본과 연출까지 했던 친구이다.

연극을 보며 울고 싶어졌다. 울음이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며칠 전, 혹은 꽤나 오래 전부터 울고 싶어졌다. 울음이 몸을 타고 도는데 눈물이 흐르지 않음. 그런 상태로 여러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울음을 터트려 줄 무언가를 기다리면서도, 그냥은 눈물이 흐르지 않은 그런 날들.

연극을 보면서 왈칵, 눈물을 쏟으며 울고 싶어졌다. 사람이 죽어 떠나는 장면에서 왜 울음이 나왔던 것일까. 그 장면은 마냥 슬픈 장면은 아니었는데. 그 장면 때문이 아니라 그 장면을 빌미로 해서 울음을 쏟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장면은 금방 전환했고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

연극은 좋았다. 연기를 탁월하게 잘 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울고 싶어졌고 눈물이 흘렀고 그래서 좋았다. 이렇게 자극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니까.

연극이 끝나고 나와 비에 젖어 있는 길을 걸으며 이번 주말엔 펑펑 울 수 있는 상황에 빠지리라, 중얼거렸다.

이랑과 매체 준비

목요일은 언제나 이랑과의 신나는 세미나 시간이다. 더군다나 오늘은 오랫동안 개인적인 이유로 오지 못했던 이랑들까지 함께해서 즐거웠고, 나눈 이야기들이 너무도 신나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매체가 발간될 예정이다. 물론 웹진 이랑은 항상 진행 중이다. 이번에 내려는 것은 종이책이다.

이랑의 종이책을 내려고 계획했던 것은 올 초부터였다. 여러 계획을 세웠고 서로 신나게/아프게 글을 썼다. 글 편집도 모두 끝냈고 이제 인쇄소에 넘기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그러나 결국 발간되지 못했다. 자금 문제였다. 최소 지원금이 막혔고 결국 웹진 이랑으로 시작했다.

그런 것이 아쉬웠다. 종이 포스터로 홍보도 했지만 한계도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보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꼭 돈이 있어야만 매체를 발간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최소비용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고, 그렇게 찾은 것이 A4지에 직접 프린트해서 수작업 하는 것이었다. 최소비용으로 발간할 수 있는 방법, 그래서 꼭 인쇄소를 거치지 않고 적은 인원으로도 발간할 수 있는 방법, 그러면서도 홍보와 소통을 모색할 수 있는 방법. 어쩌면 그것이 A4지에 직접 프린트해서 만드는 종이책이다. 처음 제안보다 내용은 훨씬 풍성해졌고(이랑들은 재주꾼들) 인쇄소에 맡겨야 하는 부담이 적은 만큼 진행이 빨랐다. 글 선정이 오늘로 마무리 되었다. 편집을 해주기로 한 이랑(고마워요!)이 화욜까지는 마무리하기로 했으니 추석이 끝나면 배포가 될 것 같다.

뭔가 나오긴 나오려나 보다. 기대와 설레임보다는 약간의 두근거림과 무덤덤함이 더 크다. 무뎌진 것이 아니라 한 번의 연기를 겪으며 손에 쥐어지기까지 기쁨을 연기하고 있다.

이런 말/글이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아픔

“구체성, 움직임, 위치의 정치성에 기반한 그의 언어에는 당위적이거나 선언적인 논리가 없다.”
-정희진 <정박하지 않는 사상가의 삶과 언어>(2005)

선생님의 이번 글을 읽으며 (최근의 또 다른 글과 함께) 한 문장, 한 문장의 빼어남과 통찰에 아팠다. 특히 위에 쓴 문장을 읽고 잠시 숨이 멎었다.

(다른 사람이 쓴) 당위적이거나 선언적인 글을 볼 때 마다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정작 루인 자신이 때때로 그런 문장을 쓰고 있거나 쓰려고 하는 모습을 접하곤 한다. 그럴 때 마다 문장을 바꾸고 몸을 바꾸려고 하지만 아직도 그리고 지금도 당위적이거나 선언적인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만난다.

그래서 위의 글을 읽으며 아팠다. 당위적이고 선언적인 글을 쓸 수 있고 그것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권력과시이며 폭력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경험/언어만이 절대적인 객관이며 다른 사람의 경험/언어는 예외일 뿐이라는 태도, 그것이 권력과시 혹은 폭력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계속해서 움직이며 과정 중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 고정되지 않는 관계를 인식하고 그런 몸 속에서 소통하는 것.
글을 쓸 때 마다, 욕망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