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랑과 매체 준비

목요일은 언제나 이랑과의 신나는 세미나 시간이다. 더군다나 오늘은 오랫동안 개인적인 이유로 오지 못했던 이랑들까지 함께해서 즐거웠고, 나눈 이야기들이 너무도 신나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매체가 발간될 예정이다. 물론 웹진 이랑은 항상 진행 중이다. 이번에 내려는 것은 종이책이다.

이랑의 종이책을 내려고 계획했던 것은 올 초부터였다. 여러 계획을 세웠고 서로 신나게/아프게 글을 썼다. 글 편집도 모두 끝냈고 이제 인쇄소에 넘기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그러나 결국 발간되지 못했다. 자금 문제였다. 최소 지원금이 막혔고 결국 웹진 이랑으로 시작했다.

그런 것이 아쉬웠다. 종이 포스터로 홍보도 했지만 한계도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보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꼭 돈이 있어야만 매체를 발간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최소비용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고, 그렇게 찾은 것이 A4지에 직접 프린트해서 수작업 하는 것이었다. 최소비용으로 발간할 수 있는 방법, 그래서 꼭 인쇄소를 거치지 않고 적은 인원으로도 발간할 수 있는 방법, 그러면서도 홍보와 소통을 모색할 수 있는 방법. 어쩌면 그것이 A4지에 직접 프린트해서 만드는 종이책이다. 처음 제안보다 내용은 훨씬 풍성해졌고(이랑들은 재주꾼들) 인쇄소에 맡겨야 하는 부담이 적은 만큼 진행이 빨랐다. 글 선정이 오늘로 마무리 되었다. 편집을 해주기로 한 이랑(고마워요!)이 화욜까지는 마무리하기로 했으니 추석이 끝나면 배포가 될 것 같다.

뭔가 나오긴 나오려나 보다. 기대와 설레임보다는 약간의 두근거림과 무덤덤함이 더 크다. 무뎌진 것이 아니라 한 번의 연기를 겪으며 손에 쥐어지기까지 기쁨을 연기하고 있다.

이런 말/글이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아픔

“구체성, 움직임, 위치의 정치성에 기반한 그의 언어에는 당위적이거나 선언적인 논리가 없다.”
-정희진 <정박하지 않는 사상가의 삶과 언어>(2005)

선생님의 이번 글을 읽으며 (최근의 또 다른 글과 함께) 한 문장, 한 문장의 빼어남과 통찰에 아팠다. 특히 위에 쓴 문장을 읽고 잠시 숨이 멎었다.

(다른 사람이 쓴) 당위적이거나 선언적인 글을 볼 때 마다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정작 루인 자신이 때때로 그런 문장을 쓰고 있거나 쓰려고 하는 모습을 접하곤 한다. 그럴 때 마다 문장을 바꾸고 몸을 바꾸려고 하지만 아직도 그리고 지금도 당위적이거나 선언적인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만난다.

그래서 위의 글을 읽으며 아팠다. 당위적이고 선언적인 글을 쓸 수 있고 그것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권력과시이며 폭력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경험/언어만이 절대적인 객관이며 다른 사람의 경험/언어는 예외일 뿐이라는 태도, 그것이 권력과시 혹은 폭력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계속해서 움직이며 과정 중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 고정되지 않는 관계를 인식하고 그런 몸 속에서 소통하는 것.
글을 쓸 때 마다, 욕망을 바란다.

대학원 수업 청강

학점 등록으로 학교를 다니다 보니 듣는 수업이라곤 수학 과목 하나 뿐이다. 그래서 청강으로 듣는 대학원 여성학 과목 하나가 소중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과목, 다른 과목과 연계된 과목이라, 다른 학과의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럴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지난 주는 수업 소개 정도였고 오늘에야 비로소 수업을 시작했는데, 좋으면서도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선생님 수업이야 좋았다. 이 “좋았다”의 의미는 마냥 좋았다가 아니라 루인과 의견이 달랐던 부분도 있었기에 자극이 되었다는 의미에서의 좋았음이다. 소심한 루인, 수업 시간에 곧 바로 루인의 의견을 제시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러지 못한다. 다음부터는 그래볼까 하는 몸의 준비를 하고 있다.

실망스러운 부분은 같이 듣는 사람들. 대학원생이 되고 학기가 지나면 다들 그렇게 거만해지고 아는 척 하고 싶어서 안달하게 되는 것일까? 두렵다. 루인도 나중에 대학원에 들어가면 그렇게 될까봐. 자신감이 있는 것과 아는 척 하며 거만한 것은 다르다. 몇몇 사람들이 보여준 태도는 거만함이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의 태도를 보며, 불안함을 읽는다. 자신의 빈약함-가방끈은 길어져 가는데 그것을 바쳐 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할 때 나타낼 수 있는 그런 거만함이 읽힌다. 정말 실망스러운 부분은 이런 부분이었다. 대학원생에 대한 어떤 환상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수업 중 간혹 말하는 의견 혹은 ‘토론’은 다소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이렇다 보니 그 거만한 태도가 더욱더 불안으로 다가온다.

수업을 듣다 잠시 정말 대학원을 가야하나, 하는 의문이 몸을 타고 돌았다. 그랬다. 이렇게 위계서열화 되어 있는 풍토에서 공부를 해야 하나. 위계서열만 있고 지적 성장은 부족하게만 보이는 풍토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루인이 원하는 만큼 얻어 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이제 시작이니 이런 걱정이 너무 앞선 것이길 바라지만, 낯선 경험으로의 느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학부생의 어설픈 소리라고 해도, 이런 느낌 지속해야 할 것이다.

#수업시간에 보여준 선생님의 이성애주의gender는 나중에 반드시 문제제기해야 할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