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돌아가면서 한 것이기에 특별할 것도 없는데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목이 아프다. 목이 쉬었고. 긴장해서이다. 긴장하면 목이 쉬고 위가 아프다. 수업 시간에 그랬다. 시작 때부터 목이 쉬고 위가 꼬이듯 아파왔다. 자꾸 물을 마셔도 갈증. 정말 오랜만의 긴장. 언제였더라. 작년 한 수업 때도 이랬다. 너무 긴장해서 결국 목이 쉬고 배가, 위가 꼬이듯 아팠다. 지금은 그 정도가 더 심해 목이 따끔하다.
어째서인지 선생님께 발표문을 드렸음에도 못 받았다고 했다. 발표 못 했다고 직접 말씀 드렸고 그래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말하기까지 많은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그저 무슨 코멘트라도 듣고 싶었다.
코멘트를 듣고 싶음. 사실 이건 상당한 갈망에 속한다. 글을 쓰고 나면 누군가가 글 전체적인 흐름과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 비판을 해주길 바라는 편이다. 하지만 사실 지금껏 만족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다. (최근 이랑매체 발간 후 고마운 평을 들었다.) 그랬기에 루인의 글에 대한 선생님의 평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너무 조심스러웠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은 조금 더듬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본 모습이다.) 왜 ‘사람들’은 자신 보다 정치적으로 소수에 속하는 사람과 있을 때 혹은 자신이 정치적 가해자의 위치에 있을 수 있음을 알 때,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할까. (뭐, 루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런 지나친 조심스러움도 “지나친 미안함”처럼 일종의 phobia다. 그래서 당황했다. 루인의 모습과 선생님의 모습이 오버랩 되고 포비아가 느껴져서. 우울한 일이다.
루인의 글 속에 루인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고/있고 루인이 가지는 세계관에 어떤 문제점이 있을 것이고/있고 무식의 산물도 있을 것이다/있다. 그렇기에 그런 지점들에 대해 코멘트를 듣거나 논쟁이 있길 바랐다. 일전에 있었던 폭력 피해 경험을 제기 했을 때, 루인이 바랐던 건, 사과만이 아니라 루인이 제기했던 문제에 대한 대화/토론이었다. (“지나친 미안함”참조) 그랬기에 선생님의 반응은 아쉬웠다.
목이 아프다. 이번 계획서에 따른 최종 논문을 쓸지 안 쓸지는 모르겠다. 쓰고 싶지만 인터뷰에 자신이 없다. 아직은 단계가 아니라는 판단과 함께.
아무튼 발표 혹은 수업 이후 몸이 완전히 이상해졌다. 붕 뜬 상태.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소통에 실패했다는 느낌이 몸을 타고 돈다. 죄송한 마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루인의 잘못이니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 마지막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