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에 우선하는 부끄러움

며칠 전 스노우캣의 그림일기를 보곤 “맞아맞아”를 연발했다.

지난 봄 즈음이었나, 쉬는 시간에 강의실을 이동하던 길에, 넘어질 길이 아니었음에도 넘어졌던 적이 있다. 무릎을 찧었는데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반응은 “아파~(ㅠ_ㅠ)”가 아니라 “누가 봤음 어쩌지”였다. 그랬기에 재빠르게 일어나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 자리를 종종 걸음으로 떠났다. 그 자리를 떠나서야 아픔에 대한 몸의 반응이 전해져 왔다. 물론 넘어진 그 순간에도 아픔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왜 부끄러움 혹은 타인의 시선에 대한 몸의 반응이 더 크게 다가왔을까.

무엇이 자신의 아픔 보다 타인의 시선에 대해 먼저 반응하도록 만든 것일까.

귀차니즘의 승리

애초 계획은 오후 즈음(그러니까 12시나 1시 즈음)에 교보에 갈까 했다. 홍익문고엔 책이 없어 교보에까지 나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귀차니즘의 승리랄까-_-;; 玄牝에 콕, 박혀 지냈다. 개강하고 처음으로 밖에 안 나가도 되는 날인데 어딘가를 가기 싫었던 것이다. 아마 내일이나 나갈 것 같다. 그러나 내일도 귀찮으면… 그래도 나가야 한다. 잉잉

전공의 “이상한” 조합

가끔씩 루인의 전공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답을 하면 그 반응이 재미있는데, 너무 한결같다는 것이다.

수학과 여성학을 전공하고 있는 루인이기에, 사람들은 물어본다, “수학을 하면서 어떻게 여성학을 하게 되었어요?” (열에 아홉이 이렇게 묻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받은 지가 꽤나 되지만 여전히 어렵다. 특히나 그 자리가 아주 간단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리라면 더더욱.

수학과 여성학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많은 걸 의미하지만 간단하게 되물으면 “어째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정도 되겠다. 어떻게 만났느냐는 질문은 답하기가 너무 어려운데 그건 기본적으로 루인의 고1때부터의 삶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시엔 여성학을 몰랐던 시절이었고 철학과 수학을 갈등하던 시기였다. 문과냐 이과냐 로 갈등하던 당시, 루인에게 수학이 어떻게 이과이고 철학이 어째서 문과인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둘은 너무도 닮아 있었고 칼로 자르듯 쉬 구분될 수 없었다. 결국 수학’의’ 이과를 택했고 그 후로 수학과 놀면서 깨달은 건, 수학은 차라리 인문학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근대 분과학문의 분류방식에 따르면).

물론 이것을 수학언어 속에서 체득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수학과 인문학은 너무도 잘 만난다고 믿으면서도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할 수는 없었다. 그 질문에 답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고 지금에 와서야 그 상상력의 놀이가 너무도 닮아 있고 서로를 같이 상상할 때 더 깊이 있는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잘 안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자세한 건 여기선 생략.-_-;;)

그렇기에 수학과 여성학이 만나는 것은 조금도 모순이 아닌 것이다. 결국 “수학을 하면서 어떻게 해서 여성학을 하게 되었어요?”란 질문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을 모순으로 보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만나는 계기가 된다. 루인 자신에겐 너무도 ‘자연스러운’ 만남이 루인이 아닌 사람들에겐 상상 ‘불능’의 영역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수학을 둘러싼 ‘오해’에서 비롯하지 않을까 싶다. 어려운 계산을 하는 것이거나 살면서 아무 필요도 없는 증명 같은 걸 배우는 학문이랄까, 뭐 그런 선입견 같은 거.

앞으로 어떻게 대답할 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얼버무리면서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고, 너무도 닮아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때론 어째서 그 둘의 만남을 낯설게 여기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 되었든 부담스러운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