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해/타인과 함께 말하기

bell hooks의 [Talking Back] “7. feminist scholarship: ethical issue”에 붙여

흑인만이 흑인 문화에 대해 말할 수 있다거나 한국인만이 한국 문화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언설은 본질주의와 cool함이다.

이 말은 백인 혹은 비흑인은 본질적으로 흑인 문화를 이해할 수 없거나 말할 수 없다는 식의 결정론이며 그로인해 백인 혹은 비흑인에겐 책임이 없다는 식의 cool함을 의미한다. 결국 흑인의 노예제 경험은 흑인에게 책임이 있으며, 현재의 성역할sex role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구조기능주의에 빠지기 쉽다. 주지하다시피 cool함은 무책임함이며 ‘나’는 세상과는 고립된, 탈육화된, 초월적인(disembodiment, disinteresting) 존재라는 착각의 산물이다. 누구나 타인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말해야 한다고 몸앓는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말 하는가 이다.

호명으로서의/젠더로서의 ‘남성’은 모든 것(생리휴가라던가, 생리대면세 등)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믿지만/믿어 의심치 않지만 호명으로서의/젠더로서의 ‘여성’이 군대의 문제점에 대해 말하면 군대도 안 갔다 왔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말 하냐며 (사이버) 성폭력을 휘두른다. 이는 주체subject로 착각하고 사는 이들의 권력적 불안이며 일상화된 폭력이다. 그리하여 이런 식의 말하기는 타인에 대해 말하기라기보다는 순전히 자신의 불안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이다.

타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기존의 앎을 유지한 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과 만나는 것이다. 타인과 만나 대화를 하고서도 기존의 편견(폭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그건 대화가 아니라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식의 횡포일 뿐이다.

타인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더 많은 담론이 있어야 하고 그런 담론들로 소통해야 한다고 몸앓는 이유는, 말하고 듣기 자체가 하나의 저항행위이면서 기존의 유일보편의 “말씀”을 상대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적인 사회에서 백인들만이 전문가로서 비백인들의 경험에 대해 말하거나(데이터화 하거나), 이성애주의 사회에서 비이성애에 대해 말하는 이성애자의 언설만이 ‘권위’를 부여 받거나,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남성’만이 다른 성들에 대해 말한다면 이는 기존의 권력체계를 강화, 유지 시키는 방식일 뿐이다. 그렇다고 반대의 상황만이 ‘정당’하다고도 몸앓지 않는다. ‘남성’이 다른 성들에 대해 말하듯 다른 성들도 자신에 대해 그리고 또 다른 성들(‘남성’을 포함하여) 에 대해 말하고 그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에 대해 다양한 담론들이 존재한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소통이 가능해지고 타인에 대해, 타인과 함께 말할 수 있게 된다고 몸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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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듣기: 루인의 집의 경우, 그리고 한국식 혈연으로 이루어진 친족체계에서의 친척들의 경우, 모임에서 주요 화자는 ‘여성’들이었다. 물론 ‘남성’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드물었고 꽤나 재미없는 방식이었다. 반면 ‘여성’들은 풍성한 어휘와 내용으로 모임의 주요 화자들이고 모임의 대화를 이끌어가는 행위자들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여성’/’남성’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남성’은 풍성한 어휘와 내용으로 즐거운 말하기를 했지만 이러한 말하기를 받아 들이는 방식은 상당히 젠더적이었다.) 잘못된 앎이 아니라면 이런 방식은 단지 루인의 이성애가족체계/친족체계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이성애가족체계/친족체계 전반에 걸친 현상일 것이다. “아버지는 항상 말이 없고 묵묵히 지켜보시는 분”이란 이미지, “어머니는 자식과 주로 이야기를 나누시는 분”이란 이미지들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라 몸앓는다. 그렇기에 말하기, 그 자체가 저항 행위가 아니라 말하고 듣기가 저항이라고 몸앓는다. 말하기가 그 자체로 저항이라는 언설은 지금껏 타자 혹은 약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타자 혹은 약자가 말을 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타자 혹은 약자로 호명된 이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_M#]

고혹적인 목소리

새벽, Beth Gibbons의 목소리에 잠이 깨었다. 한없이 절망적이고도 달콤한 목소리.

MD를 사용하기에, 특별히 아끼는 한 장의 MD 디스크엔 이런 날 들으면 좋을 앨범들이 들어 있다. Themselves 두 곡, Nina Nastasia 앨범 세 장, Beth Gibbons 독집, Portishead 두 장. 이렇게 담아둔 디스크는 여직 한 번도 바뀐적이 없다.

Nina Nastasia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한없이 달콤하면서 절망적인 목소리. 그래서 듣고 있으면 황홀하게 죽음으로 이를 수 있을 것만 같은 환각. 그렇게 잠이 들었다. 몸은 길 잃어 헤매고 멀리서 음악 소리만 들려왔다.

그런 새벽, Beth Gibbons의 매혹적인 목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다. 너무도 달콤해서, 설탕을 입힌 독약 같았다. 자꾸만 먹게 되는 달콤함, 온 몸에 퍼진 독으로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중독.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다시 듣고 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빗소리에 함께 울음이 묻어나는 웃음을 듣는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누군가 죽여줄 것만 같은 매혹에 빠진다. 바란다.

나의 침울한

불안하고 설레고 우울하고 두근거리는 몸을 앓고 있다.

다시는 이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 이런 몸을 기억하는 몸이 옛 몸을 불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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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황인숙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는 비가 되었어요.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난 날개 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나는 신나게 날아가.
유리창을 열어둬.
네 이마에 부딪힐 거야.
네 눈썹에 부딪힐 거야.
너를 흠뻑 적실 거야.
유리창을 열어둬.
비가 온다구!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