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만이 흑인 문화에 대해 말할 수 있다거나 한국인만이 한국 문화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언설은 본질주의와 cool함이다.
이 말은 백인 혹은 비흑인은 본질적으로 흑인 문화를 이해할 수 없거나 말할 수 없다는 식의 결정론이며 그로인해 백인 혹은 비흑인에겐 책임이 없다는 식의 cool함을 의미한다. 결국 흑인의 노예제 경험은 흑인에게 책임이 있으며, 현재의 성역할sex role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구조기능주의에 빠지기 쉽다. 주지하다시피 cool함은 무책임함이며 ‘나’는 세상과는 고립된, 탈육화된, 초월적인(disembodiment, disinteresting) 존재라는 착각의 산물이다. 누구나 타인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말해야 한다고 몸앓는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말 하는가 이다.
호명으로서의/젠더로서의 ‘남성’은 모든 것(생리휴가라던가, 생리대면세 등)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믿지만/믿어 의심치 않지만 호명으로서의/젠더로서의 ‘여성’이 군대의 문제점에 대해 말하면 군대도 안 갔다 왔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말 하냐며 (사이버) 성폭력을 휘두른다. 이는 주체subject로 착각하고 사는 이들의 권력적 불안이며 일상화된 폭력이다. 그리하여 이런 식의 말하기는 타인에 대해 말하기라기보다는 순전히 자신의 불안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이다.
타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기존의 앎을 유지한 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과 만나는 것이다. 타인과 만나 대화를 하고서도 기존의 편견(폭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그건 대화가 아니라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식의 횡포일 뿐이다.
타인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더 많은 담론이 있어야 하고 그런 담론들로 소통해야 한다고 몸앓는 이유는, 말하고 듣기 자체가 하나의 저항행위이면서 기존의 유일보편의 “말씀”을 상대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적인 사회에서 백인들만이 전문가로서 비백인들의 경험에 대해 말하거나(데이터화 하거나), 이성애주의 사회에서 비이성애에 대해 말하는 이성애자의 언설만이 ‘권위’를 부여 받거나,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남성’만이 다른 성들에 대해 말한다면 이는 기존의 권력체계를 강화, 유지 시키는 방식일 뿐이다. 그렇다고 반대의 상황만이 ‘정당’하다고도 몸앓지 않는다. ‘남성’이 다른 성들에 대해 말하듯 다른 성들도 자신에 대해 그리고 또 다른 성들(‘남성’을 포함하여) 에 대해 말하고 그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에 대해 다양한 담론들이 존재한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소통이 가능해지고 타인에 대해, 타인과 함께 말할 수 있게 된다고 몸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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