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 단상

어제까지 해서 사흘에 걸쳐 [반지의 제왕]을 봤다. 이제서야 봤느냐고 하면 그동안 그다지 끌리지 않았기 때문. 보는 내내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1. 프로도와 샘의 관계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불편했던 점이라면 영웅주의, 평화를 위해선 전쟁이 필수라는 식의 근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죽어가는 무수한 존재들과 틀에 박힌 성역할은 상상력의 한계라고 밖에 볼수 없다. 그랬기에 왜 프로도가 영웅이 되어야 하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고생도 샘이 더 많이 했는데.
샘은 프로도와 시작부터 같이 한다. 반지원정대를 떠나기 전에도 그 후에도. 물론 프로도가 반지를 가지고 있고 그 갈등을 이겨내는 고생을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몸과 정신의 이분법이라는 근대적인 사유의 전형이라 몸앓는다. 프로도보다는 샘이 더 많은 고생을 했는데 이는 샘이 프로도의 고통까지도 같이 고민하기 때문이다. 샘의 고통을 보고 있으면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을 동시에 사유하는, 나와 타인을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간달프에 의해 설정된 권력적인 위계관계로 인해 그런 것이긴 하지만 (친절은 약자의 윤리라고 했던가)분명 프로도의 모습과는 다른 부분이다.
하지만 항상 프로도만 걱정하고 결론에서도 프로도에게 공을 돌리지 샘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영웅주의는 타인의 고통을 비가시화 시키고 단 한 명의 영웅만 괜찮으면 다 괜찮다는 식의 폭력의 반복이다.

-이 영화를 보며 꽤나 짜릿했던 것은 둘 사이에 보여주는 미묘함때문. 크크. 첫 편인 [반지원정대]에서부터 보여주는데, 둘의 관계는 말 못하는 퀴어queer관계(극히 좁혀서 보면 ‘동성’애 관계)인 것이다.
성별화된 현대 사회의 ‘정상화’된 이성애 관계(gender role)로 인해 비이성애 관계는 늘 비가시화되고 억압된다. 샘과 프로도의 관계를 보고 있으면 이런 억압이 너무도 자명해진다. 혼자 떠나려는 프로도를 샘이 물에 빠지면서까지 따라가려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둘의 모습 등 둘이 나오는 장면들의 상당 부분이 강압적 이성애 사회만 아니었어도 충분히 연인로 ‘발전’할 가능성들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왜 호명으로서의 ‘남성’들이 스포츠나 전쟁영화, 갱영화에 열광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스포츠나 싸움은 ‘공식’적으로 ‘남성’간의 신체접촉이 ‘허용’되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다. 전쟁영화 같은 경우, 전우애 혹은 우정이라는 핑계로, 억압되어 있는 ‘동성’에 대한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짜릿하게. 그리하여 자기 안에 금기시된 ‘동성’애적 욕망을 자극한다.
샘과 프로도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애증?)을 드러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욕망을 느꼈다. 이 영화의 의외의 재미라면 이 부분이다. [Lucia y el sexo]에 만큼 짜릿하다. 냐햐.

2. 스미골 혹은 골룸

등장 때 부터 매력적인 스미골은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있는 캐릭터로 보였다. 다른 인물들의 경우, 사실, 거의 전형적인 인물들이었다. 프로도는 영웅 드라마의 전형이고 샘 역시 그런 영웅과 함께 하는 전형적인 인물이고. 다른 인물들 역시 별로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런 읽기가 다소 거칠게 읽은 것이라 놓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인정.) 하지만 분열되고 다중적인 자아의 갈등을 보여주는 스미골 혹은 골룸의 모습은, 가장 와 닿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갈등하고 그 갈등으로 고통 받고 그럼에도 계속해서 집착하는 모습, 그 집착이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데도 그런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은 가장 ‘포스트모던’한 인간상이지 않을까?
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그려지는 다른 ‘영웅’들에 비하면 백배는 더 매력적이다.

3. 레골라스


이 사람, 멋지다. 꺄악>_<
심장이 두근두근. 꺄릇
안타까운 일이라면 이 사람이 출현한 영화들이 루인의 취향과는 한참 다르다는 점. 애석함을 감출 수가 없다.ㅠ_ㅠ

학력과 실력 사이

오랜만에 ps가 서울에 왔다. 두어 달 뒤면 서울 근처로 이사한다고 방을 보러 다닌다고 한다. 만족스런 방을 만나진 못했지만 시간을 내어 루인을 만나러 사는 곳 근처까지 온 것이다.

곧 있으면 결혼을 한다고 한다. 파트너가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기에 결혼 후엔 직장을 옮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한국 성별화된 제도에서 결혼이 어떤 식으로 젠더와 직업, 노동인구의 이동 등에 영향을 미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회사를 다녔던 ps의 파트너는 서울로 발령이 났고 그렇잖아도 서울로 직장을 구해볼까 했던 ps는 서울 소재, 대기업 몇 곳에 지원서를 넣었다고 했다.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가, 조심스럽게 결혼 후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갈 회사가 정해져 있느냐는 의미이다. 인테리어 기사인 ps는 실력이 상당해서 여러 회사가 언제든지 자기네로 오라고 할 정도이다. 그렇게 스카웃되어 간 회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처음엔 뻣뻣하게 굴다가도 일주일만 지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인사를 청할 정도라고 하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러나 몇 달 전, 지원서를 넣었지만 어렵겠다는 소식을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후 특별히 이직에 관한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기에 걱정이 되어 물었던 것이다.

대답이 아팠다.
“유학파들이 쟁쟁한데…”
“경력도 있고 실력도 있잖아”
“대기업에선 실력이 아니라 학벌으로 뽑잖아.”

이 대답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침묵하고 말았다. 결국 대학원을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하긴, 대학원은 몇 해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실력은 있지만 학벌 문제로 항상 힘들어 했었기 때문이다. (왜 인테리어 기사는 인테리어 관련 과를 나와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수학과를 나왔다고 해서 다 수학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국문과를 나와야만 소설을 잘 쓰는 것도 아닌데.) 또 한 번 학벌이라는 인종주의의 벽을 만난 것이다.

언젠가 정희진 선생님은 “한국은 비서울지역대학, ‘여성’, ‘장애’인이면 취업에서 아웃out”인 사회라고 말씀 하신 적이 있다. 군대를 간 ‘남성’과 군대를 면제 받을 수 있은 빽이 있는 ‘남성’ 만이 ‘정상성’을 획득할 수 있는 사회면서 동시에 지역과 학벌과 같은 집단주의가 ‘정상성’내의 위계서열을 만들어 내는 사회이기도 하다.

어쩌면 대기업이 아니라 또 다시 중소기업에 취직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수시로 밤샘 작업을 하면서도 몇 달씩 윌급이 연체될 지도 모르고. 그런 경험이 여러 번 있었고(어쩌면 지금도) 앞으로도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러니 어쩌면 대학원을 갈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ps가 할 수 있는 협상 방법이기 때문이다.

대학원에 가거나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에 가는 방법들, 이런 다양한 방법들이 현실에 존재하는 억압 체계들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행동이라고 몸앓지 않는다. 그건 현재의 상황에서 자신의 욕망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한 협상력이라고 몸앓는다. 현존하는 사회제도에 대한 대응 방식은 다양하고 ps의 방법은 그런 다양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것을 현존하는 폭력들을 묵인하고 지지하는 것으로만 읽어 내는 것은 그런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권력자의 시선이라고 몸앓는다. 동시에 협상력을 가진 이들을 무기력한 존재로 타자화 시키는 또 다른 폭력이며. 이러한 협상력이 기존의 제도를 흔들 수 있는 힘라고 믿는다. (꼭 ‘운동’을 해야만 그것이 ‘저항’인 것은 아니란 의미이다.)

이렇게 믿으면서도 한편으로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답답하고 안타깝고 이런 폭력적인 제도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다시 한 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지만, ps의 힘을 믿으며 옆에서 응원 하려한다.

bell hooks읽기

요즘 살짝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늦잠이야 자지 않지만 생활이 다소 나태해진 편이다. 가장 큰 증거로 bell hooks읽기의 느슨함일 테다.

bell hooks읽기는 방학 계획이 아니라 올 한 해의 계획에 속한다. 어쩌면 몇 해에 걸친 다양한 계획의 일부이기도 하고.

처음, bell hooks를 읽겠다고 작정한 것은 작년 여름 즈음이다. 토익,토플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번역된 책만 읽겠다고 잘 버티던 시간은 작년을 기해 벽을 만났다. 읽고 싶은 책, 참고 문헌에서 흥미로운 책들은 거의 대부분이 영서였고 번역이 안 되어 있었다. 처음에야 적당히 무시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무시가 쌓이다 보니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영어 ‘따위’ 몇 해째 구경도 안 한 상태였고 끝까지 외면하고 살 작정이었지만 슬슬 영어와 친해져야 겠다는 몸앓이가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 영어 문헌의 일 순위에 bell hooks가 있(었)다.

하지만 중학생때 부터 외면한 영어가 쉬 친해질리 없었다. 작년 여름 잠깐 문법책을 조금 본 걸 끝으로 간헐적으로 bell hooks의 짧은 눈문이나 읽는 정도였다. 그러다 겨울이 왔고 충동적으로 이번 겨울에는 [Feminism Is For Everybody]를 읽어야지, 라는 계획을 세웠다. 이미 번역되어 있는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번역이 불만스러웠기도 하지만 ‘쉬울’거란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bell hooks의 영어는 쉬운 편이다. 실제로 Judith Butler 같은 이들과 비교해 봐도 그렇지만 bell hooks 자신이 쉬운 글쓰기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각주 없는 글쓰기, 영어만 읽을 수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글쓰기를 지향하기에 영어가 많이 서툴러도 (그로 인해 버벅거리며 고생이야 하지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당시엔 이런 것까진 몰랐고 그저 광고 문안에 의해 쉬울 거란 편견에 의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시작했고 매일 몇 페이지씩, 분량을 정해 읽었다. (그 결과는 이곳) 그러고 나서 잠시 다른 글을 조금 읽다가 마음을 먹고 bell hooks를 순서대로 읽겠다고 계획했다. [Ain’t I A Woman], [Feminist Theory], [Talking Back], [Yearning] 이렇게 초기 네 권을 선택했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일 년이 걸리든 이 년이 걸리든 다 읽은 후에 다른 작가들을 읽겠노라고.

그렇게 지난 3월 부터 읽기 시작했고 지금은 [Talking Back]을 마무리 지을 단계에 있다. ([Ain’t I A Woman] 서평은 여기, [Feminist Theory]은 또 다른 계획이 있어서 서평은 아마 올 연말에나?) 문제는 [Talking Back]을 읽으며 다소 느슨해진 것이다.

영어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언어이기에, 두어 시간 정도만 보고 있어도 스트레스를 동반하며 머리에서 쥐가 나곤 한다. 한국어라면 몇 시간이고 상관 없겠지만. 머리에서 과부하가 온다는 것은 그 만큼 몸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직은 익숙하지 않기에 그렇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요즘 다소 느슨해진 상태이다. 기본적으로 두 번씩 읽기 때문이라는 핑계도 있을 것이다. bell hooks읽기가 즐겁지만 다소 정체된 상태란 느낌. 이 때문에 [Yearning]을 읽기 전에 다른 저자의 책을 읽고 읽을까 하는 몸앓이도 하고 있다.

어쩌려나. 시간은 많기에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하면 되는데, 어떻게 할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