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에서 음악을 더 즐기고 싶다는

뮤즈 공연 이후 이런 저런 음악을 더 찾아 듣고 있다. 한동안 기존에 듣던 음악만 들었는데 어쩐지 새로운 음악을 더 배워야지 싶어, 그리고 공연장을 조금이나마 더 자주 찾고 싶어 음악을 새로 찾고 있다. 기존에 내한을 했던 밴드 중 ‘그때 갈 걸 그랬어’라는 아쉬움도 함께 되새기면서.
공연장을 다녀오면 확실히 음악은 음반을 즐기는 재미도 있지만, 공연장에서 즐기는 재미가 따로 있다. 좋아하는 저자의 글을 읽는 재미와 강연을 듣는 재미가 다른 것처럼. 물론 글과 강연은 근본적으로 다른 영역이라 글은 좋지만 강연은 못 하는 경우도 많지만, 라이브는 대체로 괜찮으니까. 음반에 비해 라이브가 별로인 밴드도 있다지만… 뭐… 어쨌거나 공연장에서 즐기는 재미는 정말 짜릿하다. 소리가 울리는 형태 자체가 다르다는 점도 크고. 뻔한 이야기고 흔한 이야기다. 그냥 공연장에서 음악 듣는 즐거움을 아끼고 싶지 않다. 경제적 상황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대한 즐기고 싶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음악을 찾고 있다. 그러면서 깨닫는데 판테라(Pantera)는 역시 가벼운 팝이었다. 슬립낫(Slipknot)은 언제 즈음 익숙해질까? 벌써 몇 번을 시도하지만 즐거울 때도 있지만 버거울 때도 있다. 더 정확하게는 내가 즐기는 기타 톤이 있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지만, 판테라는 가볍지만 슬립낫은 버겁다고 느끼는 어떤 톤, 느낌 같은 것이 있어서 흔히 ‘빡센’ 음악이라고 하는 경계가 나만의 방식으로 형성된다. 비근한 예로 툴(Tool)을 부담없이 즐기는 나에게 ‘툴은 우울하고 절망적 분위기’라는 설명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제 툴이 내한하는 일은 없겠지? 크흡… 그때 갔어야 했어… ㅠㅠㅠ 올 연말에 하는 조용필 공연엔 갈 수 있을까? 흑…

아직 어리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나이를 먹고 그래서 얼굴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하는 일이 어쩐지 편안하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 나는 아직 한참 어린 나이라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고, 어떤 사람에겐 나이가 든 상태다. 나이가 들었다기엔 뭔가 어정쩡하지만 상관없다. 그냥 나이를 먹는 일이 편안하다. 혹은 나이를 먹어간다는 점을 깨달을 때마다 안심이 된다. 언제나 내 법적 나이로 보이는 얼굴이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는데 대충 그런 것도 같아 괜찮다.
그러고 싶었던 적 있다. 23살 혹은 27살엔 생을 마감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정말로 스스로 마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순간엔 미련이 남아서, 어떤 순간엔 성공하지 못 해서 그 모든 나이를 지나왔다. 그 모든 나이를 지나 몇 년이 지나자 어느 순간 편안해졌다. 흔히 남들이 말하는 ‘이룬 것’도 없는데 그냥 편안해졌다. 늘 불안하고 취약하지만 그냥 이런 불안과 취약을 조급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애써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그냥 그렇게 되었다. 불안과 취약함이 없어지진 않지만, 불안과 취약함은 내 삶을 이루는 중요한 축이지만 그냥 이것이 내 삶의 일부란 점을 묵인할 수 있게 되었다. 비염을 내 삶의 동반자로 인식하듯. 요즘 들어 비염으로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고 한두 시간씩 뜬눈으로 지낼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비염 자체는 그냥 받아들이듯. 불안하기 싫다고, 취약하기 싫다고 애쓰기보다 그냥 그걸 나의 일부로 인식하는 태도가 생긴 건 괜찮은 일이다. 나이가 더 들면 이런 불안과 취약함을 지금보다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좀 더 퀴어할 수 있으면, 좀 더 변태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봐야 한없이 평범하고 평이하겠지만.
어차피 여분의 삶이니까. 그리고 시간이 더 많이 흘러 육십대가 되었을 때도 지금 알고 있는 많은 트랜스젠더퀴어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만날 수 없다면 그건 또 그 나름의 최선의 선택이, 혹은 불가피한 상황이 야기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칠십대에도 지금 알고 있는 트랜스젠더퀴어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여분의 삶을 살면서 참 욕심도 많다.

지인의 예측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 활동을 시작하고 1~2년 정도 지났을 때였나. 아니면 그 보다 몇 년 더 지났을 때였나. 같이 활동하던 ㅋㄷ가 내게 말하기를, 루인은 (흔히 말하는) 활동가는 못 될 거고 연구자인데 운동판, 활동판에 감이 있는 연구자가 될 거라고 말했다. 그 시절 나는 공부를 하고 싶어했지만 연구자 운운할 깜냥 자체가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그때도 쪼렙인 건 마찬가지다. 아울러 나는 오래오래 활동가로 살아갈 거란 고민도 있었다. 그런데도 ㅋㄷ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나는 ㅋㄷ의 평가가 꽤나 정확할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활동가와 연구자를 분명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막연한 감으로 대책 없이 나누자면, 나는 연구자, 혹은 학생, 지식노동자로 더 동일시하는 편이다. 아니, 이런 저런 구분을 할 필요 없이 그냥 나를 학생으로, 영원한 학생이길 바라는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연구자나 학자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고 그냥 학생으로 살아갈 듯하다. 공부를 하기 위한 시간, 글을 쓰기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를 위해 시간 일정을 조율하는 식이다. 하루에 8시간을 진득하게 공부할 수 없는 상황(물론 퀴어락 업무 자체가 연구의 일부지만 어쨌거나 뭔가 좀 다르다)이 때론 슬프고 속상할 때도 있는 그런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나는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몸, 즉 학생이란 용어 본연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듯하다. ㅋㄷ의 예측은 참 대단하지. 그땐 나도 몰랐는데 그걸 예측하다니.
영원히 쪼렙 학생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