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대보름 산책을 하다가

추석 당일 아침 눈을 뜨니 메일이 두 통 와 있었다. 모두 강연 요청이었다. 두 통의 메일을 모두 확인하고는 “뿌웨엑, 하기 싫어!!!”라고 소리치며 이불 속에서 바둥거렸다. 강연 준비 스트레스가 극심하니 이렇게 반응한다…
하지만 추석을 보내면서, 그날 저녁 대보름을 보며 1시간 가량 산책을 하다가 그냥 강연을 모두 하기로 했다. 좀 가리긴 하겠지만(내가 뭘 가릴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하기로 했다. 뀨웩.

추석 잡담

만약 어머니가 안 계신다면 명절은 어떤 형태여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차례 같은 걸 완잔 없애고 싶다는 마음과 차례를 지낸 뒤 고향/본가에 가길 원하지 않는 내 친구들을 모아 같이 음식을 나눠 먹어도 괜찮겠다는 고민이 교차했다. 하지만 역시 번거로운 일이겠지. 무엇보다 이렇게 대이동하는 행사, 행복하다는 사람음 별로 없는 이 행사는 왜 지속되는 걸까? 명절만 다가오면 여성 스트레스 기사 뿐만 아니라 남자도 스트레스 받는다는 기사가 수시로 나오는데 무엇이 명절 대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걸까? 참으로 미스테리다. 물론 이런 글을 쓰는 나도 그 대이동에 동참하고 있다.
명절이면 가장 큰 걱정은 바람과 보리 두 고양이다. 연락을 취할 수도 없는 두 고양이를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이다. 왜 명절은 가족과 헤어지는 걸 감내하는 시간이어야 하는 걸까? 새로운 불만이 추가된다. 평소에 함께 하는 가족과 명절 등 특정한 날에만 함께하는 가족. 가족이란 무엇이냐.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가사노동, 집을 온전히 관리해야 한다는 부담을 덜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은 어디서나 하지만 부담은 줄어든다. 내가 어머니의 가사노동을 착취하거나 그 노동에 빚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려나 부담이 줄어들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느낌. 어머니에겐 나쁘기만 하냐면, 이렇게 와야 어머니도 식사를 제대로 챙기신다. 그래서 상황이 좀 복잡하다. 어머니는 가사노동이 늘고 나는 부담이 줄어드는데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어머니는 식사를 제대로 하신다. 결국 슬픈 일이고 속상한 일이다.

양성평등 잡담

양성평등이란 말 자체가 문제입니다. 인간은 양성으로 구성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 사실도 아닙니다. 양성평등이란 말은 남녀 평등을 지향하는 언어가 아니라 인간을 양성으로 규제하는 언설이죠. 개인이 양성이란 이원젠더 규제에 포섭될 때만 평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겠다는 거고요. 다른 말로 트랜스젠더퀴어에게 양성평등이란 말은 매우 문제가 많은 언설이며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언어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적하듯 트랜스젠더퀴어를 사유하지 않는 젠더는 모든 사람을 억압하고요. 즉 성소수자의 인권 없이는 성평등도 없습니다.
오는 10월 9일인가,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를 한다고 합니다. 여성가족부가 양성평등은 성적소수자를 포함하지 않는다며 대전시 성푱등조례 개정을 요구했고 대전시는 조례를 개정했고 이에 항의하는 행사라고 알고 있고요. 그 행사에서 30여명의 인터뷰를 영상으로 만든다는데 한마디를 요청받아서 한 이야기입니다. 아마 10초 이내, 한두 문장 정도 나갈 듯합니다.
사실 양성평등 개념은 트랜스젠더퀴어에게 재앙이라고 말할까 했습니다. 하지만 말 자체가 자극적일 뿐만 아니라 재앙이 현실이기도 하지만 은유기도 해서 결국 사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잘 한 거 같아요.
마지막 문장은 참가자 모두가 공통으로 하는 말입니다. 사실 썩 내키지 않는 표현입니다. 뭐라 말하기 힘들다 싶게 좀 찜찜한 표현이라서요. 인권이 곧 평등이냐 싶고, 성적소수자의 인권이 성평등과 긴밀하지만 전제 조건일 수 있나 싶기도 하고, 성적소수자의 인권이 성평등과는 또 어떤 관계인가는 깊게 논해야 할 점이니까요. 각 용어 자체도 따져야 하고요. 물론 구호가 복잡하면 구호로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포기해야 하는 점은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공통 구호를 말했고요. 하지만 제가 평소에 쓸 언설은 분명 아닙니다.
혹시 그날 시간이 되면 많은 분이 참가하시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