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가 어쨌다구에 실린 내 글 비판

[여성혐오가 어쨌다구]를 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그 책에 실린 내 글이 늘 찜찜하다. 이유는 간단한데 트랜스젠더퀴어를 혐오의 피해자로만 기술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술할 경우,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특히 의료적 조치를 규범 삼는 커뮤니티에서 발생하는 비이성애 혐오를 은폐할 뿐만 아니라 혐오의 더욱 복잡한 층위를 매우 단순하게 만든다. 이른바 성적소수자 커뮤니티에서 ‘트랜스젠더퀴어는 최고의 피해자/약자다’와 같은 방식으로. 아울러 비트랜스페미니스트의 트랜스 혐오를 비판하는 동시에 트랜스젠더퀴어가 규범적 삶을 욕망하는 지점을 좀 더 정교하게 설명해야 했다. mtf/트랜스여성이 평범한 여성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욕망, 젠더퀴어가 평범함 혹은 기존 질서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을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풀어야 했다. 그래야 논의가 제대로 전개된다. 하지만 혐오의 복잡한 층위를 살피겠다고 주장한 나의 글은 사실상 혐오의 복잡한 층위를 매우 단순하게 만들었다. 물론 나는 트랜스혐오나 바이혐오를 출판물 형태로 분명하게 설명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혐오의 혐오의 혐오 대상과 같은 방식으로 글을 구성하면 안 되었다. ‘누가 최대 피해자다’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게 글을 쓰면 안 되었다. 이건 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 물론 진부한 변명, 지면의 한계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 최초 원고는 230매 가량이었는데 다른 원고에 비해 너무 길어서 50매 가량을 덜어내고서야 출판할 수 있었다(덕분에 글이 그나마 좋아졌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핑계인데 그냥 처음부터 구조를 달리하면 될 문제였다. 그러니까 그 글은 명백하게 실패한, 아니 그냥 잘못 쓴 글이다. 그 글의 세세한 부분은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한 편의 완결성을 갖춘 글이란 측면에선 실패했다. 사람마다 글을 평가하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내 글을 이렇게 평가한다.

블로그 방문자가 몇 명인지 확인하고

블로그에 몇 명이 방문하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블로그 자체 관리자 페이지에서 계산하는 방문자 인원이고 다른 하나는 구글 애날리틱스에서 계산하는 인원이다. 대충 보면 블로그 관리자 페이지에서 알려주는 방문자와 구글 애날리틱스에서 알려주는 방문자는 최소 10배에서 최대 20배까지 차이가 난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구글 애날리틱스를 기준으로 하면 블로그 관리자 페이지가 과장을 하는 것이거나 후하게 계산하는 것이고, 관리자 페이지를 기준으로 하면 구글 애날리틱스가 지나치게 인색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블로그에 광고라도 달겠다면 구글 애날리틱스를 기준으로 하기 마련이라, 구글 애날리틱스가 더 정확하겠지? 아마도.
예전에 블로그 광고로 수익 올리는 방법을 정리하는 글을 읽었다. 블로그를 개설하고 구글 애날리틱스와 연결하고 글을 꾸준히 쓰면서 대충 한 달 정도 지나면 100명 이상은 방문한다고 했다. 오호호. 그 사람이 염두에 둔 주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대충 그렇다고 했다. 나는 1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그럼 어느 정도일까요? 오호호. 사람들이 네이버에서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유가 있다.
그러니까 몇 명 정도 방문하는지 궁금하시다면,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과 ‘모모님도 읽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가 아니라 ‘모모님도 읽고 있어!’라고 확신하는 바로 그 사람만 방문하고 있습니다. 우후후.
무엇보다도 ‘변방의 쪼렙 블로거’라는 나의 자기소개는 통계가 증명한다. 이히히.
나는 이 상황이 즐겁고 안심인데 더 편하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가 뭐라고 떠들어 봐야 논란은커녕 극소수 방문자에게만 읽힐 뿐이다. 논란이 발생하려면 방문자가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하는데 내 블로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 블로그에 악플이 없는 이유도 그냥 무관심한 블로그라 그렇겠지. 뉴후후. 아마도 (정기, 부정기) 방문자는 이미 내가 뭐라고 떠들지 예측할 테니 헛소리를 해도 자비를 베풀어주시겠지. 뉴후후.
언제나 지금 쓰는 글이 내가 출판할 수 있는 마지막 글이길 기대하지만, 결코 그런 글을 쓰지 못 하는, 그런 글을 쓸 용기와 언어가 내게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에선 그냥 고만고만한 글을 생산할 뿐이다. 그 고만고만한 글이나마 읽겠다고 방문해주시는 분들께 고마울 뿐이다. 정말로 고맙다.
+
고마움과는 별개로, 방문자가 0이라고 해도 나는 블로그를 운영하겠지.

어떻게 사유하고 말할 것인가…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인상적인 구절.
미국 스톤월 항쟁 이후 게이 운동이 본격 만들어질 때 주요 역할을 한 이들 상당수는 세대 간의 사랑(혹자는 소아성애라고 부르는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세대 간의 사랑은 매우 익숙한 실천이었지만 사회적 분위기가 변함에 따라 세대 간의 사랑 실천은 지워지고 그냥 게이로만 기록에 남았다고 한다.
이 내용은 역사가 기록되는 방식 뿐만 아니라 섹슈얼리티가 구성되는 방식을 함께 말해준다. 성적 지향/선호 이슈는 섹슈얼리티에서 젠더 개념을 지우고, 인종 이슈를 지우고, 나이 개념을 지우고, 계급 이슈를 삭제한, 달리 표현하면 여러 범주를 동질의 것으로 고정 시킨 것이 성적 지향 개념이다. 또한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될 법한 모든 것을 삭제하며 역사를 멸균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가 모든 것을 사유할 순 없고 모든 곳에서 활동할 순 없다. 하지만 어떻게 사유하고 말을 할지 집요하게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
그러고 보면 얼추 10년 전 정희진 선생님 강좌를 열심히 들었다. 무료 유료 다 들었는데, 한 번은 모 대학교 총여에서 주최한 강좌에 갔다가 ‘당신 나 스토커야?’란 말을 들었지. 후후후. 그 후 또 다른 특강에서 선생님은 강의를 시작하기 전 “제 강의를 이미 들어보신 분?”이란 질문을 했고 나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마이크를 켠 상태로 “쟈긴 50번은 들었잖아”라고 말씀하셨지. 후후. 물론 당시 기준으로 50번은 아니었다. 그저 당시엔 대학에서 수업을 하셨기에 수업을 두 학기 연달아 들었고, 그 다음 학기엔 청강을 허락하지 않으셔서 녹음 파일로 들었지. 후후후. 그 외에도 여기 저기 찾아가며 들었지. 사실 특정 주제 강의가 아닌 이상 특강 내용은 대체로 겹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수업 강의까지 들으면 많은 내용이 비슷하다. 때론 거의 같은 내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들으면서 내가 배웠던 건, 어떻게 생각하고 상황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였다. 처음부터 그것을 배우려고 쫓아다니기도 했고. 돌이켜보면 그때 그렇게 하길 참 잘했다 싶다. 물론 지금 내가 잘 하고 있느냐면 그건 아니란 게 함정. ㅠㅠㅠ
++
그나저나 그때도 선생님은 인기강사이자 저자였는데 지금도 그렇다. 자기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