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경험

오늘 저녁에 겪은 일.
혈연 가족 행사(이른바 친척 모두의 행사는 아니고)로 인도식 커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채식카페에서 채식으로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해서 선택한 곳. 베지터리언이라고 적혀 있는 커리 메뉴 대다수가 치즈를 포함하고 있어서 주문하며 치즈를 빼달라고 했다. 아울러 난에 버터가 들어갈 듯하여 평소엔 안 먹는데 버터난이 따로 있어서 괜찮은 듯하다 싶어 일반 난을 주문했다.
주문이 들어간 뒤 곧바로 매니저가 와서 난에 계란이 들어간다며 다른 것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그래서 제안을 받아 전통빵(이름을 까먹…;;;)을 주문했다.
다른 구성원은 스페셜 메뉴를 주문했는데 각 음식이 나올 때 모두가 먹을 수 있는 경우엔 모두가 먹을 수 있다(계란과 우유 제품을 안 먹는 사람도 먹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
그리고 내가 먹을 커리가 나왔는데, 서빙하는 사람을 따라 온 매니저가 커리를 확인하더니 재빨리 회수했다. 치즈가 들어갔다며 치즈를 빼고 다시 만들어서 주겠다는 말과 함께.
보통 이와 같은 서비스를 안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꼼꼼하게 확인해주자 가게에 신뢰가 상당히 상승했다. 다른 체인점도 이와 같은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할지는 알 수 없지만 체인점 자체에 신뢰가 가는 수준이었다. 매니저가 알레르기에 감수성이 있는지 채식에 감수성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꼼꼼하게 신경 쓰는 가게라면 믿고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가게가 이렇게 신경을 써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강하게 품는다. 물론 다른 많은 가게가 바뀌려면 식당 직원의 근무여건 및 대우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
+
원래 가게 이름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이런 경험은 소문을 내야 하니까…
인도 레스토랑 강가 역삼점이다.

발표나 강의를 저어하는 상태

블로깅을 위해 이미 두 편을 썼지만 결국 공개를 유예하기로 했다. 지금 쓰는 글은 공개할까?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올해 더 이상 강의는 없다. 일년에 많아야 너댓 건의 강의 혹은 공개적으로 발표를 하기에, 한달에도 몇 건의 강의를 하는 사람에 비하면 일도 아니지만 강의를 그만해야지라는 고민을 계속 하고 있다. 물론 몇 년 동안 했던 곳에서 앞으로도 불러준다면 그곳에선 하겠지만, 글쓰기 강좌를 열까 고민하고 있지만 이것과 별개로 새로 받는 강의나 발표는 하지말까란 고민이다. 더 정확하게는 얼굴이 알려지는 자리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고민이다.
(물론 외쿡에서 경비를 일체 지원하면서 부른다면 가겠습니다. 후후후. 하지만 내 인생에 이런 일이 더 생길리 있겠어?)
어렵지 않을 고민일 수 있다. 아니, 애당초 요청하는 사람도 없는데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다. 자아과대증이고 과대망상이다. 하지만 적은 기회라도, 몇 명 안 되는 사람에게나마 얼굴이 알려지는 게 부담스럽다. 글을 쓰고 싶고 공부를 하려하고 아카이브 작업을 하려는 것이지 내가 알려지길 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발표나 그런 자리를 통해 미약하게나마 얼굴이 알려지는게 괜한 행동 같다. 강의나 발표가 나의 고민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자리란 점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기회란 점에서 배움이 크지만 그 배움과는 별개로 부담스럽다. 강의나 발표와 공부가 별개의 행위가 아님에도 자꾸만 저어한다.
정확하게 무엇이 싫고 부담스러운지는 모르겠다. 내가 듀나 같은 삶을 선망해서 이럴 수도 있다. 전혀 다른 이유, 내가 아직 깨닫지 못 했지만 다른 이유에서 이럴 수도 있다. 내가 사람 얼굴과 이름을 기억 못 해서 이럴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시간이 지날 수록 강의나 발표 자리가 부담스럽다. 단순히 마이크 공포니 하는 것과는 다르게 저어하는 몸으로 변하고 있다.
불러만 주면 어디든 가겠다던 나는 어떻게 이렇게 변했을까? 불러만 주면 어디든 쓰겠다는 다짐은 여전하지만(앞으로 몇 년 간은 유예하겠지만) 어디든 가는 것은 저어하고 있다.
+꾸워어 ㅠㅠㅠ 발표가 하나 남아있다. ㅠㅠㅠ

잡담

ㄱ.
나대지 말자. 조심하자.
하지만 가장 어려운 문제.
ㄴ.
당사자주의, 당사자는 해당 분야를 잘 알 것이라는 인식은 결국 해당 학문을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당사자가 가장 잘 말 할 수 있다는 언설은 공부할 필요는 없지만 뭔가 내가 직접 말할 자신은 없거나, 내가 애써 공부하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 쉽게 알 수 있다는 인식의 반영을 수도 있다. 물론 단언할 순 없지만 이런 의심을 강하게 할 때가 있다. 여성이니까 여성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태도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내가 반성할 부분이다. 내가 부끄러운 부분이다.
ㄷ.
당사자주의에 빠지면 해당 이슈는 또한 당사자만의 문제로 제한된다. 학문을 무시하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해당 이슈를 사유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면죄부가 된다.
ㄹ.
평생 함께할 대상이라고 했는데, 어느 순간 박멸해버리겠다고 다짐한다면 이것은 어떤 혐오의 일종인 것일까? 그러니까 비염은 내가 평생 함께 할 동반x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올해를 기점으로 비염을 어떻게든 뿌리뽑거나 터지지 않도록 관리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것은 질병과 함께 사는 삶을 혐오하는 것일까? 종종 이런 고민을 한다. 물론 비염을 터지지 않도록 완전히 관리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ㅁ.
그러고 보니 블로그를 운영한지 대충 10년을 채운 듯하다.
ㅂ.
법학 전공자의 논문은 왜 심심하면 100쪽이 넘는 걸까? 50쪽이면 짧은 것만 같은 착시를 주는 이유는 왜일까? 흠…
ㅅ.
공부의 의미는 다양합니다. ‘공부’하세요, 인생에서 남는 것은 공부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인식이야말로 최고의 성장이고, 치유이고,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희진.  http://ch.yes24.com/Article/View/28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