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나 강의를 저어하는 상태

블로깅을 위해 이미 두 편을 썼지만 결국 공개를 유예하기로 했다. 지금 쓰는 글은 공개할까?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올해 더 이상 강의는 없다. 일년에 많아야 너댓 건의 강의 혹은 공개적으로 발표를 하기에, 한달에도 몇 건의 강의를 하는 사람에 비하면 일도 아니지만 강의를 그만해야지라는 고민을 계속 하고 있다. 물론 몇 년 동안 했던 곳에서 앞으로도 불러준다면 그곳에선 하겠지만, 글쓰기 강좌를 열까 고민하고 있지만 이것과 별개로 새로 받는 강의나 발표는 하지말까란 고민이다. 더 정확하게는 얼굴이 알려지는 자리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고민이다.
(물론 외쿡에서 경비를 일체 지원하면서 부른다면 가겠습니다. 후후후. 하지만 내 인생에 이런 일이 더 생길리 있겠어?)
어렵지 않을 고민일 수 있다. 아니, 애당초 요청하는 사람도 없는데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다. 자아과대증이고 과대망상이다. 하지만 적은 기회라도, 몇 명 안 되는 사람에게나마 얼굴이 알려지는 게 부담스럽다. 글을 쓰고 싶고 공부를 하려하고 아카이브 작업을 하려는 것이지 내가 알려지길 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발표나 그런 자리를 통해 미약하게나마 얼굴이 알려지는게 괜한 행동 같다. 강의나 발표가 나의 고민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자리란 점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기회란 점에서 배움이 크지만 그 배움과는 별개로 부담스럽다. 강의나 발표와 공부가 별개의 행위가 아님에도 자꾸만 저어한다.
정확하게 무엇이 싫고 부담스러운지는 모르겠다. 내가 듀나 같은 삶을 선망해서 이럴 수도 있다. 전혀 다른 이유, 내가 아직 깨닫지 못 했지만 다른 이유에서 이럴 수도 있다. 내가 사람 얼굴과 이름을 기억 못 해서 이럴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시간이 지날 수록 강의나 발표 자리가 부담스럽다. 단순히 마이크 공포니 하는 것과는 다르게 저어하는 몸으로 변하고 있다.
불러만 주면 어디든 가겠다던 나는 어떻게 이렇게 변했을까? 불러만 주면 어디든 쓰겠다는 다짐은 여전하지만(앞으로 몇 년 간은 유예하겠지만) 어디든 가는 것은 저어하고 있다.
+꾸워어 ㅠㅠㅠ 발표가 하나 남아있다. ㅠㅠㅠ

잡담

ㄱ.
나대지 말자. 조심하자.
하지만 가장 어려운 문제.
ㄴ.
당사자주의, 당사자는 해당 분야를 잘 알 것이라는 인식은 결국 해당 학문을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당사자가 가장 잘 말 할 수 있다는 언설은 공부할 필요는 없지만 뭔가 내가 직접 말할 자신은 없거나, 내가 애써 공부하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 쉽게 알 수 있다는 인식의 반영을 수도 있다. 물론 단언할 순 없지만 이런 의심을 강하게 할 때가 있다. 여성이니까 여성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태도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내가 반성할 부분이다. 내가 부끄러운 부분이다.
ㄷ.
당사자주의에 빠지면 해당 이슈는 또한 당사자만의 문제로 제한된다. 학문을 무시하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해당 이슈를 사유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면죄부가 된다.
ㄹ.
평생 함께할 대상이라고 했는데, 어느 순간 박멸해버리겠다고 다짐한다면 이것은 어떤 혐오의 일종인 것일까? 그러니까 비염은 내가 평생 함께 할 동반x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올해를 기점으로 비염을 어떻게든 뿌리뽑거나 터지지 않도록 관리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것은 질병과 함께 사는 삶을 혐오하는 것일까? 종종 이런 고민을 한다. 물론 비염을 터지지 않도록 완전히 관리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ㅁ.
그러고 보니 블로그를 운영한지 대충 10년을 채운 듯하다.
ㅂ.
법학 전공자의 논문은 왜 심심하면 100쪽이 넘는 걸까? 50쪽이면 짧은 것만 같은 착시를 주는 이유는 왜일까? 흠…
ㅅ.
공부의 의미는 다양합니다. ‘공부’하세요, 인생에서 남는 것은 공부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인식이야말로 최고의 성장이고, 치유이고,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희진.  http://ch.yes24.com/Article/View/28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