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슬아치와 실좆은 미러링 관계인가?

오늘 오후에 한국여성학회 2015 여름캠프에서 발표했던 원고 전문입니다. 사실 내용이 많이 아쉬워요. 더 다듬어서 따로 글을 만들어야 하나…라는 고민이 안 들 정도로 급하게 써서 그냥 블로그에 공유합니다. 하하 ;ㅅ;
문장부터 구조화까지 진짜 다 뜯어 고치고 싶지만 다른 하고 싶은 게 있으니 일단 참으려고요… 흑역사 생성 확정!
발표 이후 보론을 추가했습니다.
행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http://goo.gl/WhSqzA
* ‘양성평등’ 논의 당시 다양한 이견이 있었다는 말은 E가 알려줬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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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학회 2015 여름캠프 2015.08.07.금. @서울여성플라자

보슬아치와 실좆은 미러링 관계인가?

-루인(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비온뒤무지개재단 부설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runtoruin@gmail.com)

*급하게 쓰느라 구조화가 많이 부족한 글입니다. 죄송합니다. (변명 하나 덧붙이면… 얼추 세 시간만에 썼… 죄송합니다. ㅠㅠㅠ)*

여성은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의 두 배로 확대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소유한 거울 노릇을 해왔습니다. … 문명사회에서 거울의 용도가 무엇이건 간에 거울은 모든 격렬하고 영웅적인 행위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과 무솔리니는 여성의 열등함을 아주 힘주어 강조합니다. 만일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면 거울은 남성을 확대시키기를 그만둘 테니까요. … 만일 여성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거울 속의 형체는 오그라들 것이고 삶에 대한 적응력도 감소될 것입니다. (울프, 56)

1929년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은 무엇인가’ 류의 글을 쓴 사람의 절대 다수가 남성임을 지적하였다. 무수히 많은 남성이, 특히 지식인을 자처하는 남성이 여성을 설명하려 했고 규정하려 했다. 주체와 타자, 그리고 여성이란 은유를 설명하는 김애령은 주체되기란 “화자의 능력”(16), 즉 “주체의 자기 정체성을 보장”(29)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힘/권력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지적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설명할 수 있음, 타인을 설명할 수 있음은 자신이 주체며 설명의 대상이 타자임을 확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즉 여성을 규정하려한 남성의 출판물은 여성을 규정할 권리, 능력, 그리고 권력이 남성에게 있음을 전시한다. 그렇기에 타자는 “주체에 의해 주체가 상상할 수 있는 모습으로 그려질 뿐”(김애령, 42)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 타자는 언제나 주체를 자부하는 존재의 환상, 기대를 투사받으며 인식론적 한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울프는 바로 이 지점을 거울로 설명하였다. 여성을 타자로 구성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젠더 역할은 남성을 두 배 이상으로 확대반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남성이 주체가 되고 권력을 실천함을 분명하게 밝혔다. 동시에 여성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면 거울 속 형체는 오그라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2015년 지금의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혐오’인 듯하다. 주지하다시피 ‘여성 혐오’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시대마다, 시기마다 그 형태와 내용을 다양하게 변주하며 지속해왔다. ‘여성 혐오’는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통치하는 방식이자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을 재생산하는 방법이다. ‘여성 혐오’는 여성의 역할, 여성의 성격/속성을 규정하는 담론을 끊임없이 지배 질서로 재생산하며 여성이 살아갈 방법을 제한한다. 여성은 ‘여성 혐오’ 담론의 한계 내에서만 활동하고 사유하고 대응하도록 규정된다. 성녀건 ‘창녀’건 악녀건 이 모든 분류는 당대 지배 규범의 한계 내에서 규정된 모습, 즉 규범적 재현이자 실천이다. 그러니까 ‘여성 혐오’는 각 시기에 적절한 여성을 생산하는 방식이며 여성이 태어나는 방식이다. 하지만 언제나 “인간의 경험은 구조를 초과한다”(정희진, 94). 지배 규범의 한계가 예상하지 못 한 방식으로 어떤 움직임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여성 혐오’를 ‘혐오’로 대응(여혐혐)하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 한 방식’으로 등장한 움직임 중 하나가 아닐까?

여혐혐은 디씨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촉발했다. ‘여성 혐오’의 언설구조, 어휘 등을 거의 그대로 차용하고 뒤집어 남성에게 돌려주는 전략이었다. 메갤의 여혐혐이 가시화되자 페미니스트 연구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이를 미러링으로, 맞대응 전략이라고 평가했다(김홍미리; 백스프; 윤보라; 이하나; 임옥희 2015). 즉 남성들이 행했던 ‘여성 혐오’를 성별만 맞바꿔 대응한 것이 여혐혐이며 이것은 남성 혐오가 아니라 남성의 행동을 되비추는 방식이란 평가다. 여혐혐을 통해 혐오를 재생산하기보다는 남성이 자신의 행태를 비춰보고 반성하길 요구하는 이 전략은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거울의 효과기도 하다. 여혐혐을 통해 ‘여성 혐오’를 했던 이들의 분개하고 분노하고 당황하는 반응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메르스 갤러리 초반에 나타난 여혐혐 반응을 되비추기라고 평가하는 언설에 형식적인 측면에서 동의한다. 그것은 분명 ‘여성 혐오’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혐오’의 불균형한 권력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되비추기 전략에 찬성하거나 그 전략을 긍정하느냐면 그렇지 않다. 거울로 되비추는 전략이 왜 이런 형식이고 이런 언설을 통해 진행되어야 하느냐고 질문하고 싶다. 다른 말로 ‘여성 혐오’ 발화 중 하나인 ‘보슬아치’와 같은 언설에 ‘실좆’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태도가 과연 무엇을 되비추는지를 질문하고 싶다.

내가 처음 이런 대응 전략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은 ‘맙소사’였다. ‘보슬아치’와 같은 언설을 되비추는 전략적 발화는 왜 ‘실좆’이어야 하는가? 즉 보지의 일대일 대응어는 자지인가? 이런 전략은 인간을 외부성기 형태로 환원한다. 여성은 보지로, 남성은 자지로. 메르스 갤러리의 여혐혐 전략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보지파티’란 모임은 2015 제16회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고 나눠준 홍보문서에서 “보지는 여성의 것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밝히기도 했다. 여성과 남성을 외부성기로 환원하는 태도는 젠더 정치학이 가장 비판하던 전략 아닌가? 내가 과문해서 그렇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수준에선 그렇다.

무엇보다 인간을 혹은 인간의 젠더를 외부성기 형태로 환원하는 태도는 트랜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비난하고 배제하던 언설의 근간이다. mtf/트랜스여성에게 남성형 성기를 갖고 태어났으면서 어떻게 여성일 수 있느냐고 비난했던 바로 언설 말이다. 트랜스젠더에게 끊임없이 ‘수술은 했니?’라고 물으며 에둘러 외부 성기 형태를 확인하려 했던 그 언설 말이다. 다양한 젠더퀴어에게 외부성기 형태를 암시적으로 상기시키며 말도 안 되는 범주 취급하거나 외부성기 형태라도 바꾸라고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발화 말이다. 인터섹스가 태어나면 여자 아니면 남자로 살아야 하며 인터섹스로 살 수 없기에 외부성기재구성 수술을 강제하며 사회적 인식에서 인터섹스를 삭제하는 바로 그 태도 말이다. 이런 언설의 근간을 이루는 태도를 두고 ‘전략적 대응’이라고 평가하는 방식이 나는 당혹스럽다.

물론 트랜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를 부정하는 언설을 ‘혐오’에 맞대응하는 전략으로 사용하는 태도 자체는 낯설지 않다. 아니, 익숙하다. 트랜스젠더퀴어를 부정하고 비난하고, 예를 들어 mtf/트랜스여성에게 ‘트랜스젠더는 여성일 수 없다’며 ‘여성’ 공동체에서 추방했던 이들 역시 페미니스트기 때문이다. 여성을 생물학적 본질로 환원하는 태도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도 트랜스젠더퀴어를 마주할 때면 ‘외부성기 환원주의’를 밑절미 삼는 태도는 익숙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궁금하다. 사람을 외부성기 형태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혐오에 맞대응하는 이 전략을 펼치는 페미니즘은 젠더를 어떤 방식으로 고민하고 있을까? 젠더 개념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을까? ‘맙소사’라는 반응에 뒤이어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또한 인간을 외부성기 형태로 환원하는 태도는 양성평등 담론과 이원젠더 규범을 승인하고 확정한다. 여혐혐이 취하고 있는 전략은 단순히 여성을 외부성기로 환원하는 태도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오직 둘 뿐인 젠더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인식을 확정하고 승인한다. 앞서 언급했듯 보지파티에서 보지가 여성의 것이란 발언, 끊임없이 실좆으로 부르는 방식은 이런 태도를 압축한다. 2013년 봄, 서울서부지법은 외부성기 재구성 수술을 하지 않은 ftm/트랜스남성 5명의 성별정정을 허가했다. 존재를, 개인의 젠더를 성기로 환원하는 언설 구조에서 이들 5명의 ftm/트랜스남성은 어떤 젠더여야 하는가? 성기 중심의 전략 구조에서 이들 ftm/트랜스남성은 본인의 의사 및 호적상 성별과 무관하게 여성으로 수렴될 위험을 내포한다. 아니, 최소한 여성의 것을 몸에 지니고 있는 존재로 강제소환된다. 물론 나는 보지파티나 여혐혐에 직접 참여하거나 이들의 정치학을 긍정하는 페미니스트가 트랜스젠더퀴어의 인권에 우호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현재의 사태에서 어떤 ‘인권’을 지지한다는 의미일지 궁금하다. 그저 ‘보편적 인권은 중요하다’란 원론 차원에서 지지하는 것은 아니길 바라며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혐혐의 전략은 그런 ‘지지’를 매우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비트랜스젠더와 트랜스젠더퀴어를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여혐혐 이슈를 둘러싸고 화가 났던 순간은 따로 있다. 여혐혐의 전략 때문은 아니었다. 여성혐오와 관련한 글을 쓴 임옥희는 메르스 갤러리와 여혐혐이란 전략을 두고 다음의 질문을 했다.

“여성 혐오에 ‘희생양 코스프레’가 아니라 혐오로 맞대응하는 것은 하나의 전략일 수 있는가? … 남성과 여성 사이의 혐오에서 권력관계의 비대칭성을 생각해본다면, 남성들이 보여준 혐오에 대한 여성들의 흉내내기를 패러디로 볼 수는 없을까?” (임옥희 2015, 57)

같은 글 말미에서 임옥희는 “똑같이 혐오라고 할지라도 다 같은 혐오는 아니다”(86)고 설명하며 이것을 맞대응 전략, 패러디로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이런 설명에 한편으론 동의한다. 다른 한편으론 분노하다. 몇 년 전 임옥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트랜스젠더퀴어와 페미니즘을 구분했다.

<트랜스아메리카>에서의 브리와 [<천하장사 마돈나>의 주인공] 동구에게 성전환 수술은 자기 몸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체현으로서의 완벽한 여성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자연으로 주어진 섹스라는 것은 없다고 끊임없이 주장해왔다는 점에서 구성주의였다면, 트랜스섹슈얼은 자연으로 주어진 섹스로 귀환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본질로 주어진 생물학적 섹스를 주장하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페미니즘이 몇십 년 동안 진척시켰던 젠더 구성주의 논의를 출발선상으로 되돌리는 셈이 된다. (임옥희 2008, 91)

나는 임옥희의 이런 평가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젠더 이론의 역사와 젠더 권력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작업이다. 임옥희는 트랜스젠더퀴어의 다양한 젠더 실천과 욕망을 평가함에 있어 트랜스젠더퀴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선 역설적으로, 임옥희의 이런 압축된 논의에 따르면 여혐혐은 어쨌거나 페미니즘을 몇십 년 뒤로 되돌리는 행위거나 페미니즘 정치학/운동이 아니다. 임옥희의 논의에서 페미니즘은 비트랜스여성과 비트랜스남성을 섹스로, 외부성기형태로 환원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를 비판한다. 그런데 어떻게 여혐혐이 페미니즘 정치학일 수 있겠는가? 논의를 꼼꼼하게 짚는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여혐혐이 외부성기 형태를 확정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태도를 평가함에 있어 임옥희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오랜 세월”과 “비대칭적인 권력관계”(2015, 86)를 끊임없이 지적한다. 축적된 역사, (이원)젠더 권력 관계를 사유하면서 여혐혐을 평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비트랜스여성의 행동을 논할 때의 태도와는 달리 트랜스젠더퀴어의 행위와 삶을 논할 땐 마치 역사와 권력의 비대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평가 작업을 진행한다. 이런 이중잣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중잣대, 이중억압 등은 가부장제가 취하는 ‘여성 혐오’의 형식 아니었나? 이런 이중잣대를 강하게 비판하는 정치학을 펼치면서 바로 그 정치학과 사유의 힘을 트랜스젠더퀴어에겐 조금도 적용하지 않는 태도는 임옥희만의 것이 아니다. 내가 만난 많은 비트랜스페미니스트에게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태도다.

그리하여 다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질문하고 싶다. 여혐혐 전략에서 나타나는 젠더란 무엇이며, 여혐혐을 긍장하는 입장에서 가정하는 젠더란 어떤 개념인가? 울프는 “만일 여성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거울 속의 형체는 오그라들 것이고 삶에 대한 적응력도 감소될 것”이라고 했다. 메르스 갤러리를 중심으로 한 여혐혐의 거울 전략은 어떠한가? 여혐혐이 그려내고 있는 혐오는 어떤 구조를 드러내는가? 적어도 지금까지의 모습은 이성애-이원젠더를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강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질서와 구조 자체를 비틀어서 오그라들 게 만들기보다는 이원젠더 질서를 더욱 안정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원젠더라는 틀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그려내고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다른 말로 여혐혐의 전략은 ‘혐오자’를 생산하고 선한 가부장을 골라내거나 생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나는 과연 현재 상황을 ‘혐오’라는 용어로 설명함이 적절한지 질문하고 싶다. 누군가를 ‘혐오자’라고 지목하긴 쉽다. 기독교 근본주의 집단을 ‘혐오’ 세력으로 지목하면 쉽게 설명이 되는 것만 같은 착각을 야기하기에 편하다. 또한 어떤 발화를 ‘혐오’ 발화라고 비난하기도 ‘쉽다’.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어려운 문제다. 여혐혐을 트랜스‘혐오’로 지목하는 것은 간단한 일인가? 아니다. 비트랜스페미니즘은 모두 트랜스젠더퀴어를 ‘혐오’하는가? 아니다. ‘혐오’란 용어를 쓰기는 쉽지만 이것은 매우 어려운 용어다. 그럼에도 ‘혐오’란 명명을 통해 더욱 복잡하고 섬세하게 접근해야 할 이슈를 단순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다. 여혐혐의 전략이 정확하게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닐까? 상대의 발화와 행동을 ‘혐오’, 특히 ‘여성 혐오’라고 규정하면서 더욱 복잡하고 섬세하게 진행해야 할 작업이 또 다른 ‘혐오’를 재/생산하는데 일조하도록 움직이는 것은 아닌지. ‘혐오’는 분명 내가 세상 및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형상하는 매우 중요한 분석틀이지만 또한 사건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어 이항대립 구조를 재생산하는 문제를 야기하기 쉽다. 페미니즘 정치학을 더욱 복잡하게 사유하기 위해 ‘인상적’이진 않겠지만 좀 더 섬세하고 구체적인 언어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참고문헌::

김애령. 『여성, 타자의 은유: 주체와 타자 사이』 서울: 그린비, 2012. 인쇄본.

김홍미리. “눈앞에 나타난 ‘메갈리아의 딸들’: 메르스 갤러리, 열린 판도라의 상자를 보며” <일다> 2015.06.11.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122

백스프. “메르스 갤러리에서 ‘남성혐오’가 쏟아져 나온 까닭은?” <직썰> 2015.06.05. http://www.ziksir.com/ziksir/view/1950

울프, 버지니아. 『자기만의 방』 이미애 옮김. 서울: 예문, 1990. 인쇄본.

윤보라. 「김치녀와 벌거벗은 임금님들」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발가벗은 말들의 세계』 윤보라, 임옥희, 정희진, 시우, 루인, 나라 지음. 서울: 현실문화, 2015. 9-45. 인쇄본.

이하나. “‘여성혐오’를 혐오하라” <여성신문> 1343호, 2015.06.15. http://www.womennews.co.kr/news/84167#.Vbx-bailykr

임옥희. 「최근 페미니즘의 이론 동향」 <오늘의 문예비평> 68 (2008): 80-95.

임옥희. 「주체화, 호러, 재마법화」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발가벗은 말들의 세계』 윤보라, 임옥희, 정희진, 시우, 루인, 나라 지음. 서울: 현실문화, 2015. 47-88. 인쇄본.

정희진. 「언어가 성별을 만든다」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윤보라, 임옥희, 정희진, 시우, 루인, 나라 지음. 서울: 현실문화, 2015. 89-116. 인쇄본.

::보론::

2015년 8월 7일 한국여성학회 2015 여름캠프의 라운드테이블 “페미니즘이 돌아왔다: 여성/혐오와 미러링의 정치학”에서 발표한 뒤 몇몇 분이 제 논의에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여혐혐 전략이 갖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발언에서 추가한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긍정적 효과, 통쾌함 등이 있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말이 붙는 정치학이 어떤 식으로 활용될지도 같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양성평등이란 용어를 적극 사용할지 말지를 논하는 과정에서 이 용어 사용에 많은 우려가 있었다고 한다. 양성평등연대가 자신들이 진정한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곳이란 식으로 말하는데, 바로 그런 식으로 이 용어가 쓰일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고 한다. 많은 우려와 비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성평등이란 용어를 채택했다. 그리고 여러 학교에 양성평등상담소, 양성평등센터 등이 생기기도 했다.

지난 7월 1일 대전시는 양성평등기본법에 따라 성평등기본조례를 제정하며 제3조2항2 성평등정책에 관한 주요사항에서 “성소수자(“성소수자”란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무성애자 등 성적지향과 성 정체성과 관련된 소수자를 말한다) 보호 및 지원”을 명시했다. 국내 어디서도 없는 그런 구절이었다. 당연히 많은 기독교 근본주의 집단이 대전시 성평등기본조례를 비난하고 비판하며 해당 구절 삭제를 주장했다. 대전시는 성소수자도 남성과 여성이기도 하기에 삭제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교회동성애대책위원회가 여성가족부에 이와 관련한 사항을 질의하자 여성가족부는 “대전광역시의 성평등기본조례는 양성평등기본법에서 위임된 사항과 그 시행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동 조례에서 성소수자 관련 내용을 규정하는 것은 양성평등기본법의 입법 취지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라는 답변을 했다. 국민일보 기사에  따르면 관련해서 두 차례에 걸쳐 여성가족부가 대전시에 삭제 촉구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물론 이 기사는 현재[발표 당시] 시점에서 기독교 관련 언론사와 국민일보에서만 보도하고 있으니 진위 여부를 조심스럽게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한 정치학이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다. 우려는 언제나 정확하게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말이 뒤따르는 정치학은 폐기하거나 철회하는 것이 낫다. 그것은 기존의 억압구조를 용인하는 태도인 동시에 현재 예측할 수 있는 위험을 용납하는 행위기도 하다. 여혐혐의 이원젠더 전략이 통쾌할 수는 있다. 유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충분히 문제가 많으며 트랜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여전히 필요할까? 질문하고 싶다.

비건망고빙수

팥빙수를 좋아합니다.

폭염의 나날이니 빙수를 좋아한다는 말이 특별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팥을 유난히 좋아하는 저는 팥빙수도 무척 좋아합니다. 하지만 비건이 팥빙수를 사먹을 수 있는 곳은… 사실상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머물고 있는 곳 주변에는요.
물론 러빙헛 신촌점에서 팔고는 있겠지만, 몇 번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마지막으로 개미가 떠 있는 짬뽕을 먹은 이후로는 가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완고하게 안 가지는 않겠지만… 그 다짐 이후론 가지 않고 있습니다. 육수 아닌 채수를 먹으러 갔는데 충수를 받았으니까요…
암튼 그래서 빙수를 먹을 일이 없는데 E느님께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무려 망고빙수! 무척 맛났어요!
오랜 만에 음식 사진입니다. 가급적 자제하고 있지만(누군가가 놀려서요.. 😛 ) 그래도 이 사진은 남겨야겠어요.

곡물과 탈병리화

건강 담론, 어떤 음식이 어디에 좋다라는 논의는 결국 건강 강박 혹은 건강담론에 결착된 논의일 수밖에 없다. 몸 어딘가에 좋다는 이야기는 특정 질병을 예방한다는 이야기며 이것은 의료가 규정한 특정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현미채식 이야기는 이미 의료화 논의에 결착된 이야기며 병리화 논의에 침투된 이야기다.
물론 건강 담론이 사회에 팽배하다는 것과 사람들이 이것을 신경쓰고 실천하느냐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신경을 쓸 때도 특정한 방식으로, 개인이 선별한 방식으로 실천된다. 탄수화물을 모두 끊고 다이어트를 한다면서 때로 폭음을 한다거나… 탄수화물을 줄인다면서 탄수화물 덩어리 병아리인 양념치킨을 먹는다거나.
건강 관련 논의가 넘친다는 것, 쇼닥터가 나오는 프로그램이 상당히 많다는 건 한국 사회가 건강에 많은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의료 기준으로 건강 수치가 위험하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고 여전히 건강한 삶의 방식을 유난한 태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면 정확하게 이 간극이 사회적 관심과 구체적 실천 사이의 간극이자 강력한 틈새란 뜻이다. 담론과 실천 사이에 등장하는 틈새를 어떻게 저항의 힘으로 재해석할 수 있을까? 저항의 힘까지는 아니어도 어떻게 지배 담론의 허상을 드러낼 소중한 순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 동시에 좀 더 구체적이고 일상의 차원에서 의료화와 병리화를 곡류와 어떻게 엮어 설명하면 좋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