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과 탈병리화

건강 담론, 어떤 음식이 어디에 좋다라는 논의는 결국 건강 강박 혹은 건강담론에 결착된 논의일 수밖에 없다. 몸 어딘가에 좋다는 이야기는 특정 질병을 예방한다는 이야기며 이것은 의료가 규정한 특정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현미채식 이야기는 이미 의료화 논의에 결착된 이야기며 병리화 논의에 침투된 이야기다.
물론 건강 담론이 사회에 팽배하다는 것과 사람들이 이것을 신경쓰고 실천하느냐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신경을 쓸 때도 특정한 방식으로, 개인이 선별한 방식으로 실천된다. 탄수화물을 모두 끊고 다이어트를 한다면서 때로 폭음을 한다거나… 탄수화물을 줄인다면서 탄수화물 덩어리 병아리인 양념치킨을 먹는다거나.
건강 관련 논의가 넘친다는 것, 쇼닥터가 나오는 프로그램이 상당히 많다는 건 한국 사회가 건강에 많은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의료 기준으로 건강 수치가 위험하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고 여전히 건강한 삶의 방식을 유난한 태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면 정확하게 이 간극이 사회적 관심과 구체적 실천 사이의 간극이자 강력한 틈새란 뜻이다. 담론과 실천 사이에 등장하는 틈새를 어떻게 저항의 힘으로 재해석할 수 있을까? 저항의 힘까지는 아니어도 어떻게 지배 담론의 허상을 드러낼 소중한 순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 동시에 좀 더 구체적이고 일상의 차원에서 의료화와 병리화를 곡류와 어떻게 엮어 설명하면 좋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다.

변태 변태한 판결문

변태회계
변태부정지출
변태경리
공개적으로 기재할 수 없는 변태적 지출
변태적인 기업경영
변태적 판매 경쟁 행위
변태적인 장부정리
변태비닐하우스 정리계획
회계장부의 변태처리
협회의 변태운영
변태적인 방법으로 수표금액을 결재하여
해운항만청의 지침에 따라 변태적인 절차에 따라
변태지출
주식을 매입하여 합병하는 변태적인 행위
예금주 몰래 변태처리케 한 경우
변태기장하였다
변태적인 어음할인
1970-80년대 판결문에 나타나는 변태의 용례입니다. 제가 변태란 용어를 얼마나 협소하게 사용하고 이해했는지 반성합니다.
하지만 이런 용례는 2000년대 들면 아마도 익숙할 방법으로 바뀝니다. 흥미로운 장면이지요.

슬픔, 단어로 설명하지 않기

누군가를 계속해서 언급하며 비판하는 글을 쓴다는 건 슬픈 일이다. 쓰고 나면 지치고 왜 이런 글을 썼나 싶다. 그런 글을 써야 해서, 할 말이 있어서 작업을 했다지만 편하지 않다.

그런데 나 나름르로 살벌하게 비판했다고 느끼는 구절이 남들에겐 순하게 부드럽다는 인식을 준다. 뻔한 소리거나 수위가 낮거나. 혹자는 이런 톤이 나의 문체라고 했지만 때론 정말 살벌한 톤으로 글을 쓰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퇴고 과정에서 끊임없이 순화되기 마련리지만… 톤이 세면 문장이 거칠고 어색해서 별로더라.

그래서 요즘의 질문은 혐오가 뭔지 모르겠다,이다. 혐오가 무엇인가? 이것은 무엇을 설명할 수 있고 어떤 현상을 포착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정말 잘 모르겠다. 혐오 프로젝트 회의에서 이야기했듯 이런저런 현상을 분석하고 명명하기 위해 다양한 용어를 사용해왔다. 어떤 뚜렷하고 선명한 용어말고 구체적 현상을 그냥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으로는 의제설정이 힘든 것일까? 요즘 고민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