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샤 P. 존슨의 삶과 죽음]이라는 다큐를 좋아하는데 그 중 유독 자주 언급하는 장면은 실비아 리베라가 노숙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노년의 모습이다. 리베라는 미국 트랜스젠더퀴어 정치에서 기념비적인 인물이고, 그래서 저 다큐에서도 리베라가 청년층과 만날 때면 엄청나게 환호받는 모습이 나온다. 그럼에도 전설적인 인물의 삶, 특히나 라틴계 하층계급 성판매자로 살았던 인물의 현실은 노숙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인물의 현실적인 생활은 역설적에게도 내게 하나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그 삶이 낫다거나 괜찮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어쨌거나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가난하지만 그럼에도 노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소중한 가능성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그 장면을 강의나 다른 자리에서 언급하고는 했는데, 사실 이런 언급을 하면 수강생의 반응이 썩 좋지는 않았다.
반응이 썩 좋지 않았던 이유를 가늠할 수 있는 이야기를 최근에 들었다. 뭐랄까, 중산층 욕망은 아니라고 해도 살만한 삶에 대한 전망이 없다면 페미니스트로, 퀴어 활동가로 사는 것, 퀴어 연구를 하는 공부노동자로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저변에 있다고. 이 불안은 정상성에 대한 욕망이나, 규범적으로 저항하는 삶을 바라는 욕망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도 불안정하고 위태로워서, 계속해서 계약직으로 살아가고, 당장 오늘이라도 잘릴 수 있고, 전세사기에도 보호받을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리베라의 노년은 위로라기보다 더 큰 불안이고 위험에 가까웠던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그동안 리베라의 삶을 말하더라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잘못 말했구나 싶어 부끄럽고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