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결혼 비판 메모

미국에서 동성애자의 결혼 합헌 결정 이후 ‘다음은 트랜스젠더’라는 분위기가 존재한다고 한다.
몇 곳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라 사실 확인이 필요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기분 더러운 태도다. 동성애자의 정치 의제는 완결되었으니 이제 트랜스젠더에게 관심을 줄게라는 태도는 이른바 LGBT/퀴어 공동체의 구성원이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시켜준다. 이른바 LGBT/퀴어 공동체의 구성원은 동성결혼 의제를 적극 지지하는 이들이며 그렇지 않은 의제를 사유하고 주장하는 이들은 구성원이 아님을 암시한다. 동시에 이런 태도는 동성애자의 동성결혼 의제가 최우선이며 트랜스젠더 의제는 그 다음이라는 의미, 즉 트랜스젠더는 동성애자에 비해 2등 시민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정말 이기적이고 오만한 이 태도는, 철저하게 지배 규범적 삶을 욕망하는 태도다. 솔직하게 말해서, 추하다.
그런데 바이섹슈얼/양성애자는? 동성애자의 동성결혼 이슈가 적법해졌으니 그 다음은 트랜스젠더란 태도는 바이섹슈얼을 누락할 뿐만 아니라 고의로 배제한다. 이런 태도는 전혀 새롭지 않다. 바이는 마치 동성애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바이는 클로짓 동성애자라고 생각하거나, 바이는 이성애 특권을 욕망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서 흔하게 나타나는 태도다.
이들은 바이섹슈얼/양성애자를 전혀 사유하지 않는다. 동성애자 다음에 트랜스젠더면 바이섹슈얼은? LGBT로 수렴할 수 없는 더 복잡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퀴어는? 이딴 식의 위계화와 순서 만들기는 결국 동성결혼 이슈가 이른바 퀴어 이슈, 동성애자의 이슈가 아니라 결혼을 제외한 모든 삶에서 어려움이 없는 매우 이성애규범적이고 동성애규범적 존재의 이슈임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그러니까 동성결혼으로 모든 걸 이뤘다고 생각하며 다음은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사실상 동성애자가 아닌 LGBT/퀴어의 의제가 무엇인지에 관심이 없다. 사유하지 않음, 혹은 동성애 중심, 동성결혼 중심의 세계관이 야기한 효과다. 때때로 마치 동성애자의 결혼이 다른 퀴어에게도 긍정적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동성 파트너 관계를 인정한 법이 바이섹슈얼은 부정하는 사건이 때때로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퀴어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말았으면 한다. 아님 퀴어는 곧 동성결혼을 원하는 동성애자만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제한하는 식으로 분명하게 그 의미를 밝히거나.
더 놀라운 점은 ‘다음은 트랜스젠더’라는 태도가 이제 동성애자의 정치 의제는 끝났거나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식의 태도를 함의한다. 더 화가 나는 일이다. 중하층 계급의 이슈, (비/미등록)이주민 이슈, 그리고 십대 혹은 청소년의 이슈는? 여전히 학교에서 왕따를 겪는 이슈는? 그리고 더 많은 이슈는? 케이트 본스타인은 동성결혼 이슈를 최우선 삼는 이들을 이기적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이기적이다. 동성결혼 이슈가 얼마나 많은 이슈를 삭제하고 지웠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화가 난다. 고민을 더 정리해서, 공부를 더 해서 동성애자 결혼을 비판하는 글을 쓰고 싶다.

잡담: 올해 연구 상황 관련

한 해 연구 주제를 잡고 그 변주라 할 수도 있고 직접 관련 있다고 할 수도 있는 내용을 공부하다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탈칵’ 아귀가 들어맞는 소리가 들린다. 공부하는 재미!

혐오, 범죄, 폭력이 올해의 주제어다. 나의 기본 고민거리지만 어쩌다보니 올해 하는 여러 연구가 이 주제어에 집중해 있고 그래서 이들 주제어를 중심으로 글을 읽고 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나의 주요 관심은 피해자로서 LGBT/퀴어일 뿐만 아니라 가해자로서의 모습니다. 퀴어 범죄자, 퀴어 가해자 논의는 자칫 혐오 발화로 읽히기 쉬운 주제지만 나는 이 상황에 조금은 더 관심의 축을 두고 있다. 물론 범죄 자체는 나의 핵심 관심.

문득 문득 고민하는데, 교정시설에서 일하셨던 고인은 내가 범죄에 관심이 많고 연구를 한다는 사실을 알면 좋아하실까? 어머니는 또 어떻게 반응하실까? 하지만 아직은 내 관심을 어머니와 공유할 의향이 없다. 나는 어머니와 몇 년 전부터 나름 친하게 지내지만, 내 관심 주제를 공유하고 싶은 사이는 아닌 관계기 때문이다. 뭔가 좀 다른 방식의 관계라 아마도 죽을 때까지 말할 일이 없을 것 같다. 변방의 쪼렙인 내가 뜬금없이 유명해질리도 없으니 더더욱. 나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지금이 좋다.

정희진 선생님 글에서 읽었는데 이른바 남성 작가는 조금만 뜨면 북콘서트나 독자와의 대화 행사를 요구한다고 들었다. 황당. 그 인기욕, 권력욕과는 별개로 왜 그렇게 귀찮은 짓을 하는 거지? 나 역시 책이 나왔을 때 책 관련 강의에 동원되곤 했지만 얼굴이 알려지는 건 정말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그나마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지금도 나로선 무리인데… 이러한 측면에서 나의 로망은 듀나다. 누구도 얼굴을 모르는, 오직 글만 아는!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선 강의도 해야 하고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배운 것이 많으며, 강의 자리에서 깨닫고 배우는 게 또 많으니 아예 포기하긴 어렵겠지… 강의를 포기하며 사는 방법이 가능할까? 온전히 생계란 측면에서. 지금이야 일년에 서너 번 강의를 하니 생계와 무관하지만… 책값을 번다는 점에선 무척 소중하다. 하지만 역시 포기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 고민…

그나저나 나는 여전히 이런저런 잡담에 관심이 많아 진득하니 공부에 집중을 못 한다. 좀 더 진득하게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 해서 아쉽다. 몸을 더 훈련하면 할 수 있을까?

수업 안 들으니 더 바쁘고 정신이 없다. 무엇보다 공적 신분은 학생인데 방학이 없으니 긴장감이 좀 더 크다. 방학 있는 학생이 부럽다. 하지만 방학 없는 학생이라(평생 학생으로 살 거지만) 내가 알아서 연구일정, 원고일정, 휴식일정을 잡아야 하고 관리를 해야 한다는 점에선 분명 중요한 시기라고 믿는다. 잘 관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방학은, 실제 방학 때가 더 바빴지만 그럼에도 심리적으로 방학이 없다는 건 큰 아쉬움이다.

지식노동자 혹은 학생으로 나를 더 많이 설명하지만 나는 또한 퀴어락에서 상근하는 활동가이자 아마추어 혹은 활동 기반의 아카비스트다. 이것은 내가 지금 어떤 땅에 살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사유하도록 한다. 고마운 일이다. 퀴어 아키비스트는 내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자리다.

이렇게… 의식의 흐름 같은 느낌의 블로깅을 마무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