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글에서 까먹은 거…

그러니까 혐오 관련 글을 출판한 지금에야 깨닫기를…

‘쟤가 여성혐오했다. 쟤 나빠!’가 아니라 혐오 자체가 무엇인지, 혐오가 그렇게 단순하게 구획되는 경험이 아니고 판단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다. 글 말미에 이 말을 붙여야 했는데…
이경의 글을 비판하며 마지막에 급하게 추가한 문단이 있다. 그런데 몇 가지를 더 덧붙여야 했다. 이경의 글은 결코 악의를 가지고, 트랜스젠더 하리수 씨를 혐오할 의도로 쓴 것이 아니었다. 이경은 여성이 받는 억압을 드러내고 싶었고 하리수 씨의 재현 방식을 문제삼고 싶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트랜스혐오, 그것도 지독한 트랜스혐오다. 마찬가지로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이른바 보수기독교연 하는 ‘혐오’집단 역시 악의를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동성애자를 혹은 성적소수자를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걱정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받는 입장에선 그것이 폭력일 수도 있고, 지독한 혐오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평생 잊지 못할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의도는 텍스트를 해석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 효과는 의도와는 늘 별개로 작동한다.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어려운 점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도로 출발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효과를 발생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기 때문이다. 그 효과는 결코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는 신이 아니기에 모든 효과를 예측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언제나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 내가 가해자가 될 수 있음, 상대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이를 계속해서 고민하는 것이 페미니스트 윤리라고 고민한다.
… 나 자신 트랜스페미니즘을 모색하는 페미니스트지만, 어디서건 쉽게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밝히길 망설이는 이유기도 하다. 내가 고민한 윤리에 내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윤리일 뿐 보편적 페미니스트 윤리가 아닙니다…

애착이론 정리…

요즘 강좌를 위해 애착이론 논문을 이것저것 읽고 있습니다. 아울러 내용 정리도 하고 있고요. 물론 여전히 애착이론을 전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뭔가 짧고 간단하게 요약을 하지만…
제가 저를 트랜스젠더 혹은 mtf/트랜스여성으로 인식하는 것은 제 어머니가 어릴 때 저에게 여성용 치마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가사노동을 일상으로 훈육했기 때문이고요.
하지만 어머니가 일관성 있게 치마를 입히거나 여성용 물품을 사용하도록 하진 않았습니다. 이른바 여성역할을 시키면서도 남성역할을 요구했죠. 그래서 저는 저를 젠더퀴어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후후후… 애착 이론 요약 끝
농담 같지만 정말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정교하게 하려면 더 정교하게 할 수 있겠지만요… 후후후

마치 내가 처음인 것처럼 분연히

가부장제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는, 성별 이슈에는 ‘과거가 없다’는 인식이다. 누군가 성별 이슈를 꺼낸다면 페미니즘과 관련한 책도 충분히 보지 않고 여성의 역사도 모른 채 자신이 처음 제기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처음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페미니스트’든 모두, 자기 혼자 ‘이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선구자 의식과 동시에 피해 의식과 울분을 갖기 쉽다. 여성의 경험은 공유되지 않고 여성의 역사는 전수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가 젠더 체제의 가장 ‘비참한’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정희진 <언어가 성별을 만든다> 97~98.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신간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를 읽다가 이 구절에서 무릎을 딱 쳤다. 마치 내가 처음 깨달은 것처럼 분연히 일어나 말하는 태도는 페미니즘만이 아니라 퀴어 이슈에서도 큰 차이가 없다. 몇 년 전엔 몇몇 트랜스젠더퀴어가 그동안 트랜스젠더퀴어 관련 모임이 전혀 없었다는 듯 성토하고 모임의 필요성을 피력하는 글을 써서 약간의 화재였다. 마치 나 이전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마치 내가 처음 시작한다는 듯.
나라고 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느냐면 그럴리가. 나 역시 이런 문제를 일으킨다. 그래서 더 트랜스젠더퀴어의 역사를 탐문하려고 애쓰고 있다. 헛소리를 안 할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기 위해서. 하지만 나는 또한 예상하고 있다. 아마도 한국 지역을 중심으로 한 트랜스젠더퀴어 역사서가 출판된다고 해도 여전히 트랜스젠더퀴어와 관련한 모든 깨달음은 마치 지금 처음 내가 깨달았다는 듯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사람이 있겠지. 그것이 비규범적 존재, 혹은 권력 위계에서 약자에 속한다고 가정하는 이들의 삶이니까. 스스로 꾸준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자신의 역사를 알려주지 않으니까. 정말로 ‘비참’하고 속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