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질투, 책, 시름…

며칠 전 퀴어영화제에서 상영한 영화 [52번의 화요일]의 큐톡에서 나도 모르게 이 영화에 “질투가 난다”고 말했다. 곧 내가 영화를 찍을 능력도 없는데 무슨 질투냐고 그 말을 수정했지만 사실 나는 질투가 난다. 더 정확하게는 영화, 연극, 책, 논문, 글 등 형식을 가리지 않고 끝내주게 좋은 작품을 만나면 나는 질투를 한다. 나도 저런 작품을 쓰고 싶다, 나는 저보다 더 뛰어난 작품을 쓰고 싶다… 물론 내 깜냥에 가당찮은 욕망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질투를 느낀다. [52번의 화요일]은 정말 질투가 나는 작품이다. 아마 몇 번 더 보지 않을까 싶다.
6월 말 즈음 여성혐오와 관련한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일정에 있어 뭔가 많이 황당한(=편집자가 철야하는) 상황이지만 어쨌거나 나옵니다. 저는 트랜스혐오와 바이혐오로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허접하고 아쉬워요. ㅠㅠㅠ 개인적 의의라면 바이 이슈를 글에 녹여내려고 애쓴 첫 번째라는 것 정도? 하지만 많이 부족해요. ㅠㅠㅠ
전시회 준비로 시름은 깊어가고…

기획자를 닮은 전시회ㅠㅠㅠ

특강을 비롯한 강의를 할 때 제 강의엔 분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특히 대학생 대상 특강일 땐 더욱 분명한 특징이다. 그것은 일군의 학생은 애당초 내 강의에 관심이 없고 일군의 학생은 제게 적대적 태도로 강의를 들어는 주고 일군의 학생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듣습니다. 하지만 강의가 끝날 즈음이면 대다수가 졸거나 졸린 눈을 억지로 비벼 뜨고 있고 여전히 반짝거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오는 일요일, 제16회 퀴어문화축제 부스행사에서 비온뒤무지개재단 부설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은 조각보와 함께 “한국 트랜스젠더 인권운동 20년”이란 주제로 전시회를 합니다. 혼자 신나는 몸으로 전시회를 준비하고 배치할 내용 선정을 끝낸 지금 깨달았습니다. 아아, 진짜 재미없는 전시회겠구나… ㅠㅠㅠ 축제 와서 학술대회 듣는 수준이겠구나… 저의 강의가 그렇듯 저의 전시 기획 역시 이런 수준이구나… ㅠㅠㅠ
그래도 귀한 자료가 여럿 전시될 예정이니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ㅠㅠㅠ

2015년 제15회 퀴어영화제 상영작, 윤초연 감독, 시절인연

오늘 본 퀴어영화제 단편모음 중 일단 하나만 짧게 메모.
윤초연 감독 [시절인연]
줄거리를 요약하면, 구보는 게이(였)지만 주변의 혐오폭력 때문에 결국 구보를 사랑한 여성과 결혼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결혼 전까지 사랑한 남자 애인(구보의 부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을 잊지 못 한다. 그리고 그가 운영하는 사진관에 들린다. 구보는 갈등한다. 그냥 이대로 살 것인가, 이혼할 것인가? 사랑하는 딸 수아에게 묻는다, 만약 엄마 아빠가 헤어지면 누구랑 살겠냐고. 수아는 고민하다가 서럽게 운다. 구보는 수아, 아내와 함께 잘 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사진작가인 옛애인을 완전히 잊지는 않는다. 자신의 책이 나왔을 때 사용한 사진은 옛애인이 찍어준 사진이다.
(아내와 옛애인의 이름 따로 있는데 제가 이름 기억을 죽어라고 못 하여 생략합니다… ㅠㅠㅠ)
게이지만 주변의 적대적 반응에 결국 이성애자연하며 결혼하고 아이를 갖지만 옛애인을 잊지 못 하는 서사는 낯설지 않다. 강제적 이성애 결혼제도를 비판하고 게이와 레즈비언의 억압을 설명할 때 많이 등장하는 서사다. 이런 서사를 문제 삼는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결론은 이혼하고 여전히 좋아하는 옛애인과 합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론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어쨌거나 결혼한 사람과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일까? 결혼하고 함께 생활을 영위한 그 사람과 좋았던 순간은 전혀 없었으며 오직 부정해야 할 억압에 불과한 것일까? 즉 헤어지고 옛애인(혹은 새로운 동성애인)과 다시 합치는 방식의 결론은 어쨌거나 결혼이란 형식으로 만난 관계를 전면 부정한다. 이런 부정은 동성애 정체성 구성에 있어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결론이 문제인 또 다른 이유는 바이섹슈얼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근거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이성애인과 맺은 일련의 관계를 부정하고 마치 이제까지 잘 몰랐거나, 사회적 억압에 의해 어쩔 수 없었고 나는 사실 동성애자다란 서사는 바이섹슈얼/양성애 범주를 관계의 범주/형식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이성애 아니면 동성애란 구도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결론은 좋아서 선택한 이성애인과의 결혼을 ‘결국 동성애인을 배신하고 이성애 특권을 취득하려는 자’로 치환한다. 바이섹슈얼을 비난하는 근거 중 하나다.
윤초연 감독의 [시절인연]은 이런 각본에서 벗어난다. 구보는 과거 게이였고 혹은 게이로 알려졌고 현재 자신이 ‘게이’란 점을 알고서 결혼한 여성 아내와 살고 있다. 동시에 딸과 무척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구보는 이들 모든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딸과 함께 살겠다고 결정한다. 동시에 최소한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있는 아내와의 관계 역시 소중하고 중요한 관계임을 받아들인다. 작가인 구보가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건 온전히 아내의 힘이었다. 그러면서도 구보는 옛애인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옛애인이 찍어준 사진을 자신의 책에 싣고 그 책을 옛애인에게 보내준다. 어떤 사랑, 어떤 관계도 부정해야 할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긍정하려는 영화의 결론은 드문 것이고 같은 섹션에서 상영된 [프라그마]와는 전혀 다른 상상력과 결론이다. [프리그마]는 이성애인과의 관계를 다소 끔찍한 것이기에 버려야 할 것으로 묘사한다. 강제적 이성애 구조에서 동성애자의 이성애 전시가 끔찍한 경험이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애인 과의 관계가 무조건 끔찍한 것이기만 한 것일까란 질문은 남는다. 이 관계를 오직 부정할 것으로만 취급하는 태도를 질문함은 무척 중요하다. [시절인연]은 정확하게 이 질문에 어떤 식으로건 답을 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관계의 형식과 내용을 다시 질문하는 영화가 좋다.
물론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 혹은 여성 구원자/조력자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 했다. 이것이 구보를 중심으로 영화를 구성하다보니 발생한 문제일 수도 있다. 이들 부부의 성역할이 기존의 성역할에 완전히 부합하는 모습은 아닌 듯하지만 여전히 어떤 한계는 있다. 이런 아쉬움 혹은 한계에도 나는 영화가 도출한 다른 방식의 결론이 좋다.
사실 이 글을 블로깅하는 이유는… 오늘 영화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이 영화를 부정적으로만 평하는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복잡하여 그 자리에서 말은 못 했지만, 감독에게 영화가 참 좋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나로선 이제 이를 전할 방법이 없지만… (어떻게 검색이라도 하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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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바이섹슈얼 관련 논의는 E느님에게서 배운 것이 상당 부분 섞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