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영화제에 상영하는 영화 [52번의 화요일]과 관련한 글입니다. 오늘 큐톡에서 나눠주려고 했지만 계획이 바뀌어 나눠주지는 않겠지만… 흐흐
영화를 보실 예정이면 영화를 보신 다음에 읽으세요.
(이 글은 밤 10시 30분에 공개됩니다.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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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엮어가는 감정적 관계
-루인(runtoruin@gmail.com)
제임스와 빌리의 갈등이 절정에 이를 때 제임스는 빌리가 자신만의 관계를 모색하고, 자신의 성적 실천을 기록한 테이프를 망가뜨립니다. 반면 제임스는 남자로 살겠다고 밝힌지 얼마 안 지나 자신이 변해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그것을 빌리에게 보여줍니다. 빌리의 기록은 삭제해야 하고 제임스의 기록은 공유할 것으로 다뤄집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발생할까요?
제임스는 가족에게 ‘커밍아웃’ 하기 훨씬 전부터 자신이 여성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참고 또 참다가 이른바 늦은 나이/시간에 남성으로 살기로 결정합니다. 이후의 52주는 제임스가 남성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며 1년이란 시간입니다. 그 과정에서 테스토스테론이 몸에 맞지 않아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제임스가 이행에 집중할 수록, 그리고 고통스러울 수록 빌리와의 소통은 줄어듭니다. 제임스는 더 이상 자신의 삶과 감정을 빌리와 공유하지 않습니다.
빌리는 어머니였던 사람이 아버지로 바뀐다는 사실을 가장 늦게 알게된 이후 일주일에 한 번, 한 번에 6시간 정도 제임스를 만납니다. 6시간씩 52주가 지나면 1년이 아니라 13일입니다. 그 시간 동안 빌리는 모든 것을 말해주는 제인이 아니라 낯설도록 과묵한 제임스를 만납니다. 빌리의 고민과 감정은 제임스에게 혹은 가족에게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빌리는 가족이 없는 비밀 공간, 자신의 욕망과 관계를 엮어가는 새로운 공간을 만듭니다. 그리고 제임스처럼 빌리 역시 자신만의 이행을 기록하지만, 제임스와 달리 빌리의 시간/정동 기록은, 이른 나이/시간이란 이유로 범죄의 증거가 됩니다. 가족이 받아들여야 할 행사가 아니라 가족 관계를 파탄낼 수 있는 범죄형 사건으로 독해됩니다.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은 균질한 모습이 아닙니다. 어떤 날의 시간은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기법을 통해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어떤 날의 시간은 자막을 놓치면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냥 흐릅니다. 시간이 흐르는 방식은 둘의 감정 변화를 표지하고 관계 변화를 상징합니다. 지금까지 트랜스젠더의 이행 경험에서 주목한 것은 트랜스젠더 개인입니다. 주변인은 지지자거나 적대자 정도였습니다. 트랜스젠더 연구에서 트랜스젠더가 겪는 감정 변화를 조밀하게 살피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지만 트랜스젠더는 외따로 살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주변인의 감정은 어떤 모습일까요? 주변인의 반응에 따른 트랜스젠더의 감정 변화만이 아니라 트랜스젠더의 행동에 따른 주변인의 감정 변화 역시 중요하게 탐문해야 할 이슈입니다. 개인은 관계에 위치하고 관계는 시간의 흐름에서 감정을 주고 받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질문해야 합니다. 기록하고 공유할 가치가 있으며 존중해야 한다는 경험과 범죄기에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부정해야 하는 경험의 경계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요? 이 간극에서 나이 혹은 시간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적법한 퀴어 실천, 적법한 퀴어 관계의 (시간)경계는 어디일까요? 나이 혹은 시간 경험은 이 한계를 정하는데 왜 그토록 강력한 규준이 될까요? 관계 맺는 방식과 함께 관계의 한계를 설정하는 문제는 이 영화가 제기하는 중요한 질문이며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할 이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