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잡담

10년 묵힌 고민을 글로 썼지만 역시나 충분히 풀어낼 수 없었다. 아직 나의 내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 주제로 글을 쓰리라 벼르고 있었고 그 동안 한두 번 관련 글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본격 풀어낸 작업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하지만 부족하다. 턱없이 부족하다. 다시 10년이 지나면 나는 좀 더 잘 쓸 수 있을까? 이번에 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렇지 않으니 다시 10년을 기약하는 수밖에.
혐오와 관련한 글이다. 혐오와 관련한 논의가 워낙 많으니 내가 말을 보탠다고 해서 특별히 새로울 것 없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소박하고 자잘하다.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 많고 관점 좋은 사람 많다. 그러니 굳이 내가 무얼 더 보탤 필요는 없다고 고민한다. 그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애쓸 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혐오와 관련하여 어떤 사건을 잠시 고민했다. 혐오에 혐오를 돌려주는 것, 혐오에 혐오로 반응하는 것은 어떤 방식일까? 이것은 폭력에 대항 폭력을 행사하는 저항 행위일까? 주인의 도구를 가져와서 주인의 집을 부수려는 행위일까? 되치는 방식은 이항대립 구조를 바꾸는 힘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되치는 행위는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혐오(최초 혐오자, 최초 혐오자를 혐오로 되치는 행위자라는 이 두 개의 항으로 이루어진 구조의 ‘외부’에 있는 다른 누군가를 향한 혐오)를 발생시키지는 않을까? ‘반대’하는 정치학은 저항 정치로서 어떤 부/작용이 생길까? 뭐, 이런 저런 잡다한 고민을 하고 있다. 구체적 사건을 밝히면 이해하기 쉽겠지만 아직 내가 그 사건을 잘 몰라서 단상만 대충 끄적이는 수박에.
나는 이미 꼰대가 된 것일까? ‘에이 아직은 아닐 거야’라는 위안 속에서 이미 꼰대인 건 아닐까? 혹은 너무 많은 것을 몰라서 이런 헛소리를 하는 것일까? 머리가 아프다.
실제 머리가 아픈데, 몸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 고민은 더 머리 아프다. 그래서 좋은 거지. 고민이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

헤롱헤롱 잡담

요즘 시기에 아프면 메르스로 의심받기 딱 좋아서 아프면 안 된다는 다짐을 한다. 하지만 몸이 좀 헤롱헤롱. 눈이 따끔따끔.
언제 즈음 나는 정신을 차릴까… 헤롱헤롱
좋은 자료, 좋은 참고문헌은 차고 넘치는데 나는 그 모든 것을 다 읽을 수 없으니 내가 이토록 무식하다는 걸 깨닫는다. 아아, 무식하여라. 그러니 나는 영원히 학생으로 남겠지. 그런데 나는 영원히 학생으로 남길 바란다. 계속해서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몸살 기운이면 집에서 쉬어야 하나? 평소라면 출근하겠는데 시절이 하 수상하여 집에서 쉬어야 하는 걸까라는 고민을 진지하게 한다.
참, 주말에 창고방 대청소를 했다. 창고방 청소만 2시간… 그런데 아직 끝내질 못했다. 몇 년을 모았던 잡지를 다 버릴 예정이라… 이태원에 살 땐 그냥 한 방에 다 내놓을 수 있었지만 이곳에선 그럴 수가 없어서 아쉽다.

연구를 평가하는 집단

남편이 아내를 폭행하는 원인은 남편과 아내의 메카니즘의 차이로 발생한다. 즉 아내는 관계지향적임에 반해 남편은 권력지향적으로 남편은 아내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가부장적 의사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남편이 아내를 폭행하는 것이 자식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식이 보는 앞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막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행사는 자식에게 감정이나 사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자식은 어머니를 함부로 취급하거나, 폭행해도 된다는 사고로 전환되어 청소년기 혹은 성년에 이르러 자신도 모르게 폭력자로 발전할 수 있다. (52-53)

부모가 자식을 상습적으로 폭행을 행사함에 있어 어릴 때는 이것을 참고 견디며 고통을 감수하지만 청소년기 혹은 성년에 접어들면서 아버지보다 힘에 있어서 앞선다고 판단되면 아버지의 폭행에 대응하거나, 심지어 살인까지 행한다. 따라서 효행장려를 통해 부모를 자연스럽게 공경하고 존경할 수 있도록 해야 근원적으로 폭력행위를 근절할 수 있다. (59)
이동임이 쓴 논문의 일부다. 아마 이곳에 오는 분이라면 이미 혈압이 오를 대로 올랐으리라. ‘나만 당할 순 없지…’는 아니고… 어디서부터 수습을 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모든 자식은 남성이며 어쩌고 저쩌고 말을 붙이는 것도 아깝다. 그냥 이런 논문을 안 읽으면 그만이고 무시하면 그만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논문은 한국연구재단의 등재후보지에 실렸다. 국내 학술지는 세 개의 등급(?)이 있는데 등재지, 등재후보지, 미등재지가 있다. 등재지와 등재후보지는 박사나 교수의 연구성과를 평가함에 있어 중요한 척도가 된다. 등재지 혹은 등재후보지에 최소 몇 편 이상의 논문을 쓸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미등재지에 게재한 논문은 연구성과에 포함되지 않으며 연구성과로 평가받기 위해선 반드시 등재후보지 이상이어야 한다. 한국연구재단에서 공모하는 사업에 지원하기 위해선 더욱더! 등재지에 실린 논문은 학술논문으로서 질을 보장받을 수 있다. 등재후보지는 등재지에 비해선 덜 하지만 역시나 어느 정도 학술논문으로서 질을 보장받는다. 어디까지나 형식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실제 게재된 논문이 괜찮은지는 별개의 문제다. 말도 안 되는 논문만 잔뜩 실려 있는데 등재지인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니 이동임의 논문이 등재후보지에 실렸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경 써야 한다. 위에 인용한 구절을 학술연구라고 주장하는 논문이 학술연구로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집단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학제에서 저런 주장을 학술연구로서 합당한 주장이라고 평가한다는 뜻이다. 여성학과나 문화학과 등에서 저런 소리를 했다간, 아니 저런 소리를 하지도 않겠지. 아무려나 내게 익숙한 학제에서 저런 소리는 가열차게 비판받을 내용이지 학술논문으로 평가받을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내게 익숙하지 않은 학제에선 저런 소리를 연구 성과로 평가한다. 이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
등재지 혹은 학제에서 수용되는 논의와 수용되지 않는 논의의 간극은 어디일까? 어쨌거나 이동임의 연구는 수용되는 논의로 승인되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정말 훌륭한 연구가 해당 학제의 관습에 부합하지 않는 형식으로 작성했다며(하지만 충분히 연구논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게재불가를 받기도 한다. 훌륭한 연구지만 학제에 혹은 등재지에 수용될 수 있는 논의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궁금하다. 등재지 혹은 학제에 수용될 수 있는 연구와 수용될 수 없는 연구의 기준 말이다. 다른 말로 등재지에 글을 게재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현재 지식 수준에서 적당히 통용될 언어와 논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존의 규범을 조금도 흔들지 않는 수준에서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계속해서 의심해야 한다.
이동임의 연구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주장과 연구가 등재후보지에 게재될 수준이라고 평가하는 연구자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연구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