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를 평가하는 집단

남편이 아내를 폭행하는 원인은 남편과 아내의 메카니즘의 차이로 발생한다. 즉 아내는 관계지향적임에 반해 남편은 권력지향적으로 남편은 아내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가부장적 의사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남편이 아내를 폭행하는 것이 자식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식이 보는 앞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막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행사는 자식에게 감정이나 사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자식은 어머니를 함부로 취급하거나, 폭행해도 된다는 사고로 전환되어 청소년기 혹은 성년에 이르러 자신도 모르게 폭력자로 발전할 수 있다. (52-53)

부모가 자식을 상습적으로 폭행을 행사함에 있어 어릴 때는 이것을 참고 견디며 고통을 감수하지만 청소년기 혹은 성년에 접어들면서 아버지보다 힘에 있어서 앞선다고 판단되면 아버지의 폭행에 대응하거나, 심지어 살인까지 행한다. 따라서 효행장려를 통해 부모를 자연스럽게 공경하고 존경할 수 있도록 해야 근원적으로 폭력행위를 근절할 수 있다. (59)
이동임이 쓴 논문의 일부다. 아마 이곳에 오는 분이라면 이미 혈압이 오를 대로 올랐으리라. ‘나만 당할 순 없지…’는 아니고… 어디서부터 수습을 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모든 자식은 남성이며 어쩌고 저쩌고 말을 붙이는 것도 아깝다. 그냥 이런 논문을 안 읽으면 그만이고 무시하면 그만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논문은 한국연구재단의 등재후보지에 실렸다. 국내 학술지는 세 개의 등급(?)이 있는데 등재지, 등재후보지, 미등재지가 있다. 등재지와 등재후보지는 박사나 교수의 연구성과를 평가함에 있어 중요한 척도가 된다. 등재지 혹은 등재후보지에 최소 몇 편 이상의 논문을 쓸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미등재지에 게재한 논문은 연구성과에 포함되지 않으며 연구성과로 평가받기 위해선 반드시 등재후보지 이상이어야 한다. 한국연구재단에서 공모하는 사업에 지원하기 위해선 더욱더! 등재지에 실린 논문은 학술논문으로서 질을 보장받을 수 있다. 등재후보지는 등재지에 비해선 덜 하지만 역시나 어느 정도 학술논문으로서 질을 보장받는다. 어디까지나 형식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실제 게재된 논문이 괜찮은지는 별개의 문제다. 말도 안 되는 논문만 잔뜩 실려 있는데 등재지인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니 이동임의 논문이 등재후보지에 실렸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경 써야 한다. 위에 인용한 구절을 학술연구라고 주장하는 논문이 학술연구로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집단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학제에서 저런 주장을 학술연구로서 합당한 주장이라고 평가한다는 뜻이다. 여성학과나 문화학과 등에서 저런 소리를 했다간, 아니 저런 소리를 하지도 않겠지. 아무려나 내게 익숙한 학제에서 저런 소리는 가열차게 비판받을 내용이지 학술논문으로 평가받을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내게 익숙하지 않은 학제에선 저런 소리를 연구 성과로 평가한다. 이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
등재지 혹은 학제에서 수용되는 논의와 수용되지 않는 논의의 간극은 어디일까? 어쨌거나 이동임의 연구는 수용되는 논의로 승인되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정말 훌륭한 연구가 해당 학제의 관습에 부합하지 않는 형식으로 작성했다며(하지만 충분히 연구논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게재불가를 받기도 한다. 훌륭한 연구지만 학제에 혹은 등재지에 수용될 수 있는 논의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궁금하다. 등재지 혹은 학제에 수용될 수 있는 연구와 수용될 수 없는 연구의 기준 말이다. 다른 말로 등재지에 글을 게재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현재 지식 수준에서 적당히 통용될 언어와 논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존의 규범을 조금도 흔들지 않는 수준에서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계속해서 의심해야 한다.
이동임의 연구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주장과 연구가 등재후보지에 게재될 수준이라고 평가하는 연구자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연구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 현병철 체제의 국가인권위원회에 강하게 항의하다

원 출처: http://queerarchive.org/bbs/171510

퀴어락의 “주목! 이 자료”에 작성한 글입니다. 더 많이 공유하려고, 기록을 위해 남기려고 제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가급적 위의 원 출처로 가셔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

2010년 한 고등학생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주관하는 ‘2010년 인권논문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에 선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학생은 다른 인권활동가와 싸우는 인권위에서 주는 상을 받을 수 없다며 수상을 거부하였습니다.
이후 줄줄이 많은 단체와 개인이 인권위에서 주관하는 시상식에 불참하거나 수상을 거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1년도 더 전에…
2009년 초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단체 협력사업에 지원했고 선정되었습니다. 재정 등 많은 것이 어려운 당시 상황에서 협력사업 선정은 무척 크고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협력사업을 통해 지렁이는 원하는 사업을 진행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당시 정부는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 참가한 시민단체에 가급적 정부 기금을 지원하지 않도록 행정 지도/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미 협력사업 단체를 선정했음에도 이런 권고에 따라 사업 개시 시기가 훨씬 지나도록 기금을 단체에 입금하지 않았습니다. 4월이 지나 5월도 한참 지나서야(두어 달 가량을 지연하고서야) 사업비를 입금했습니다. 그런데, 인권위가 사업을 지연시켰음에도 사업 마감은 기존의 공시대로 마무리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둘째, 당시 이명박 정부가 지명한 신임 인권위원장 현병철을 지렁이는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현병철은 인권과 관련한 아무런 활동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지명은 인권위를 정부의 뜻에 맞추는 조직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인권단체가 현병철의 자진사퇴 및 지명철회를 요구했습니다. 인권단체의 강력한 반대에도 이명박 정부는 현병철을 인권위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렁이는 정부와 인권위의 행태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현병철 체제의 인권위와는 협력사업을 할 수 없다고 결정하고 협력사업을 철회하였습니다. 지금 주목하는 자료는 바로, 협력사업 철회를 알리는 성명서입니다. 물론 당시 지렁이의 사업 철회는 별다른 주목을 못 받았습니다.
현병철 위원장 체제에서 인권위의 위상은 이전과 결코 같지 않습니다. 국내외에서 인권위를 매우 우려하고 있으며 보수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결정(인권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결정)도 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 혐오 발화를 종종했던 인물을 비상임위원으로 위촉하였고요. 비록 지렁이의 결정은 당시 별다른 주목을 못 받았지만 그 당시의 판단은 정확했고, 최소한 LGBT/퀴어 운동에선 이 활동을 중요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덧붙이면,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 그나마의 인권협력 사업도 철회했던 지렁이는 2010년 2월 활동 잠정 중단을 선언하였습니다. 공식 해소는 2012년 5월이지만 활동 잠정 중단은 사실상 해소에 준하는 결정이었습니다.
관련 문서는 http://queerarchive.org/bbs/171463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시분초를 따진다면 최초가 아닐 수는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