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탈병리화, 젠더/섹슈얼리티] 강의를 6월 22일 부터 시작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장애여성공감은 젠더/섹슈얼리티 정치와 장애 운동의 교차를 통한 운동과 연대의
확장을 위하여 2014년부터 장애, 탈병리화, 젠더/섹슈얼리티 연구모임(이하 연구모임)을
진행해 왔습니다.  연구모임에서는 정상성을 기준으로 장애와 성을 바라보는 관점에
도전하기 위하여, 특정한 몸과 성의 영역을 질병, 중독, 범죄 등으로 구분하는 기준에
주목하였습니다. 이 기준은 장애인과 성소수자를 구분 지을 뿐만 아니라
합법과 불법, 정상과 비정상, 질서와 무질서, 우월과 열등으로 나누는기준이 되고
차별과 억압의 논리로 연결됩니다.
 탈병리화 연구모임은 현장, 법, 의료담론, 문화텍스트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연구모임의 고민거리를  중간 정리하고,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내용이지만 관심 있는 분들과 함께 채워나가는 시간을 기대합니다.
 
 
 
* 진행내용
 
● 6월 22일 (월)  의료화와 생의료화 모델 : 장애학에서의 함의
                                                    – 최은경 (인문의학연구자)
● 6월 24일 (수)  탈병리화 장애정치의 길찾기 : 재생산기술분석을 중심으로
                                                    – 황지성 (장애여성공감 연구위원)
● 6월 29일 (월)  무성성의 병리화와 정치화 : 장애와의 교차성
                                                    – 김은정 (장애여성공감 연구위원)
● 7월  1일 (수)  만성질환과 병리화 : 아픈 사람들과 병리화 담론 사이의 긴장
                                                   – 전혜은 ([섹스화된 몸] 저자/여성주의 연구자)
● 7월  6일 (월)  성도착의 병리화와 성적 규범 : 치료와 처벌, 권리와 정체성의 관계들
                                                   – 나영정 (장애여성공감 정책연구원 SOGI법정책연구회)
● 7월  8일 (수) 애착은 어떻게 범죄가 되는가 : 양육의 성공, 범죄의 탄생
                                                   – 루인 (트랜스/젠더/퀴어 연구소)
● 7월 13일 (월)  발달장애인 성교육 : 병리화와 정책, 제도화의 보수화
                                                   –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 7월 15일 (수) 몸의 등급을 다시 생각한다 : 장애등급제와 탈병리화
                                                   – 김상희 (장애여성공감 이사)
● 7월 20일 (월) 다른 몸 되기의 매력과 긴장 사이 : 장애/인 연기를 중심으로
                                                   – 진경 (장애여성공감 전 활동가)
 
 
 
참  가  비 :  1강좌당 1만원, 전체강좌 5 만원 (전체강좌의 경우 개근일 경우 수강료 전액 환불!)
장       소 :  서울특별시 강동구 올림픽로664 대우한강베네시티 상가101동 409호 장애여성공감 교육장
일       정 :  2015년 6월 22일 부터 ~ 7월 20일 (매주 월, 수)  7시 30분 시작
모집인원 :  관심있는 사람 누구나 30명
신청방법 :  전화 또는 홈페이지에서 신청서를 받아 메일로 발송
                http://goo.gl/forms/35MePbwHz1 <- 신청가능
입금계좌 : 우리은행 1005-101-837442     예금주 : 사단법인 장애여성공감 (입금 후 연락부탁드려요!)
연  락  처 : 전화 02) 441-2384   메일  wde214@gmail.com
지       원 : 서울특별시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 참가하면 퀴어된다?

“퀴어퍼레이드 참가하면 게이된다”, “퀴어퍼레이드를 보고 정체성 혼란이 생기면 어떡하냐”란 말을 이른바 혐오 세력이 하곤 한다. 한편으로 나는 이런 말에 진지하게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고민한다. 그냥 대차게 비웃어주면 그만다. 저 언설의 프레임, 즉 퀴어를 부정적 존재로 이해하는 인식에 말려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표현 중에, “빙어 축제에 참가하면 빙어되나요?”와 같은 것이 있는데 그냥 이 정도의 비웃음이면 충분하다고 고민한다. 중요한 것은 저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혐오 세력의 언설이 매우 정확한 진단이라고 판단한다.
인간은 언제나 오염된 존재다. 혐오 세력의 ‘우려’가 내포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을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으로만 오염시켜야 하고 다른 규범과 실천에선 격리시켜야 한다는 불안한 강박, 퀴어를 멸균해야 한다는 공포다. 다른 말로 저 ‘우려’는 인간이 주변의 영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으며 그런 노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실제 인간은 관계와 사건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고 그런 영향을 통해 지속적으로 흔들리고 혼란을 겪고 또 변한다. 정확하게 이런 지점, 저 ‘우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지점에서 다시 사유할 때,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고 퀴어가 되면 어떡하느냐고? 퀴어가 안 되면 그것이 더 문제다. 어떤 사건을 겪음은 그 사건을 겪기 전과 겪은 이후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즉 이성애자-비트랜스젠더가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한 이후 퀴어퍼레이드가 주창하는 어떤 정치학, 퀴어퍼레이드 참가자 각자가 주장하는 정치학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인상을 받고 그와 관련한 고민을 한다면 그 참가자는 이미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변한 것이며, 정확하게 이런 점에서 퀴어의 포괄적 범주에 속하게 된다.
그리하여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고 퀴어가 되면 어떡하냐”는 ‘우려’에 대응하며 “빙어축제에 참가하면 빙어가 되냐”는 반응은 더 위험하고 문제가 많은 대응일 수 있다. 전자가 인간의 오염됨을 염두에 두는 인간관이라면 후자는 이를 차단하는 인간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가 인간의 유동성을 끊임없이 염두에 두고 동시에 이를 경계하고 싶어하는 태도라면, 후자는 인간의 유동성 자체를 전제하지 않는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차게 비웃는 방식으로 저 ‘우려’에 대응할 지점은 저런 ‘우려’를 통해 유포하는 혐오와 적대지 저런 언설에 내재하고 있는 인간관은 아니다.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해서 퀴어가 되면 어떡하냐고? 그런데 그게 왜 문제지? 어떤 사건을 겪은 사람은 변할 수밖에 없다. 퍼레이드는 참가자의 인식 뿐만 아니라 ‘구경꾼’의 인식도 변하도록 요구하는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퀴어’가 된다면 이것은 퍼레이드의 좋은 효과 중 하나다. 퀴어퍼레이드는 퀴어를 이해함에 있어 이성애제도를 전혀 고민하지 않으면서 손쉬운 수용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퀴어 이슈를 끊임없이 논쟁하고 떠들면서 이성애-비트랜스젠더건 LGBT/퀴어 혹은 트랜스젠더퀴어건 이들 모두가 퀴어 이슈에 연류된 존재란 점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와 ‘그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연류되어 있다. 그리하여 저 ‘우려’는 퀴어퍼레이드의 효과와 영향을 매우 잘 평가한 언설이다. 인간의 변화와 오염 가능성을 끊임없이 염두에 두면서도 퀴어 이슈에 오염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하는 태도가 문제다.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해서 퀴어되면 어떡하냐!!!”
“아이구, 그렇게 되면 정말 좋지요. 퀴어퍼레이드가 지향하는 바가 그것이니까요.”
*물론 현재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팀의 정치적 목적이 이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축제 퍼레이드팀이 고민하는 정치적 목적은 훨씬 복잡하고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하니까요. 이 글에서 ‘지향하는 바’는 제가 해석하는 측면입니다.

퀴어퍼레이드, 노출이 불편한 사람, 퀴어의 공공 노출 2

참조: http://goo.gl/29X95o [솔직히 내용은 별로임, 더 정교하게 서야 하는 글이었음]
퀴어문화축제 퀴어퍼레이드의 선정성으로, 더 정확하게는 ‘빤스’를 입고 나오는 사람으로 인해 일부 LGBT/퀴어가 커밍아웃을 꺼릴 수 있다는 말을 있다고 들었다. 이런 언설이 어느 정도 설득력도 얻고 있다고 한다. 곤란한 말이다. 이런 언설은 커밍아웃을 예정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규범적이고 얌전한 사람이라고 가정한다. 현재 커밍아웃을 하고 싶지만 망설이는 사람은 빤스를 입고 나오는 모습이 불편하고, 혹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편견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사회적으로 가정하는 문화시민의 모습의 정확하게 부합하길 욕망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한다. 이 가정부터가 문제다. 이 가정에 부합하는 사람이 분명 존재하지만, 개별 존재와는 별개로 이 가정은 위험하다. 이른바 선정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배제할 경우, 커밍아웃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된다. 이성애규범성과 동성애규범성에 매우 잘 들어맞거나 그것에 부합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만이 자신을 LGBT/퀴어로 커밍아웃하거나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제한/규정할 뿐이다. 그런 규범에 애당초 부합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규범에 부합하며 살길 원하지 않는 존재는? 그런 규범에 부합하기엔 사회적 조건이 전혀 다른 사람은? 즉 선정성이 커밍아웃을 꺼리도록 한다는 말은 그런 규범에 부합하며 살라는 정언명령이다. 누군가가 커밍아웃하길 꺼릴 것이라는 염려는 염려가 아니라 규범적이고 얌전하게 살라는 강한 정언명령이다. 그런 규범에 부합하거나 거의 근접하는 사람만이 적당한/진정한 LGBT/퀴어라는 강한 규정이다.
퀴어퍼에이드에서 노출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호모포비아로 규정되는데 강하게 반발한다고 들었다. 노출 반대를 혐오 발화로 등치하는데 분노한다는 뜻이리라. 자구 그대로 따진다면 노출 반대가 곧 혐오 발화는 아닐 것이며 호모포비아라고 하기 힘들고, 동성애라는 막연한 개념을 혐오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퀴어포비아라고 부를 수는 있을 듯하다. 이른바 문화시민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퀴어라고 통칭한다면 노출 자제를 요구하는 발언은 호모포비아는 아니라고 해도 퀴어포비아라고는 할 수 있으며 혐오발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혐오발화라면 그 이유는 단순히 퀴어를 배제했기 때문이 아니다. 노출 자제를 요청하는 발언은 노출을 자제하는 퀴어퍼레이드 참가자는 인정하고 혐오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하고 싶다. 어떤 변태는 인정하고 어떤 변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지위, 표현의 적절함을 가를 수 있다는 믿음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적절함과 적절하지 않음을 규정하는 오만한 권력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누가 그에게 그 오만한 권력을 주었는가? 즉 특정 LGBT/퀴어는 인정하지만 어떤 한도를 넘어선 LGBT/퀴어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만큼 오만하고 무례한 말이 없다. 이런 언설은 자신을 판관으로 위치짓는다. 그럼 이 경계를 규정하거나 구분할 판관 권력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특정 집단을 구분하는 권력을 실천하면서 자신은 호모포비아가 아니라고, 즉 그런 권력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지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러니까 노출을 자제해야 한다는 언설은 이성애규범성과 동성애규범성을 가장 충실하게 실천하는 발언이어서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규범에 벗어난, 엇나간, 빗나간 존재를 판별할 수 있고 배제할 수 있는 권력을 실천하는 발언이어서 문제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런 발언을 하는 사람을 퀴어포비아라고, 굳이 포비아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면 그렇게 부르고 싶다.
(하지만 나는 포비아라는 표현 자체를 쓰고 싶지 않다. 뭔가 다른 언어, 표현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노출을 자제해야 한다는 발언보다, 이 발언을 호모포비아라고 규정하는데 분개하는 발언이 더 문제라고 고민한다. 혐오라고 규정하는데 분개하는 감정은 마치 자신을 객관적이고 진심으로 염려하는 것으로 위치짓고 싶어하는 욕망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욕망을 지닌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고 믿는다. 자신을 조금도 성찰하지 않는, 자신의 위치를 단단하게 고정하는 태도기 때문이다. 정말로 퀴어퍼레이드를 염려한다면, 이런 발언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같이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말의 더 정확한 의미는, 지금 나의 발언을 시간이 지났을 때 내가 비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발언 역시 지금 내가 인식하지 못 하는 무언가를 심각하게 놓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