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 http://goo.gl/29X95o [솔직히 내용은 별로임, 더 정교하게 서야 하는 글이었음]
퀴어문화축제 퀴어퍼레이드의 선정성으로, 더 정확하게는 ‘빤스’를 입고 나오는 사람으로 인해 일부 LGBT/퀴어가 커밍아웃을 꺼릴 수 있다는 말을 있다고 들었다. 이런 언설이 어느 정도 설득력도 얻고 있다고 한다. 곤란한 말이다. 이런 언설은 커밍아웃을 예정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규범적이고 얌전한 사람이라고 가정한다. 현재 커밍아웃을 하고 싶지만 망설이는 사람은 빤스를 입고 나오는 모습이 불편하고, 혹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편견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사회적으로 가정하는 문화시민의 모습의 정확하게 부합하길 욕망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한다. 이 가정부터가 문제다. 이 가정에 부합하는 사람이 분명 존재하지만, 개별 존재와는 별개로 이 가정은 위험하다. 이른바 선정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배제할 경우, 커밍아웃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된다. 이성애규범성과 동성애규범성에 매우 잘 들어맞거나 그것에 부합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만이 자신을 LGBT/퀴어로 커밍아웃하거나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제한/규정할 뿐이다. 그런 규범에 애당초 부합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규범에 부합하며 살길 원하지 않는 존재는? 그런 규범에 부합하기엔 사회적 조건이 전혀 다른 사람은? 즉 선정성이 커밍아웃을 꺼리도록 한다는 말은 그런 규범에 부합하며 살라는 정언명령이다. 누군가가 커밍아웃하길 꺼릴 것이라는 염려는 염려가 아니라 규범적이고 얌전하게 살라는 강한 정언명령이다. 그런 규범에 부합하거나 거의 근접하는 사람만이 적당한/진정한 LGBT/퀴어라는 강한 규정이다.
퀴어퍼에이드에서 노출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호모포비아로 규정되는데 강하게 반발한다고 들었다. 노출 반대를 혐오 발화로 등치하는데 분노한다는 뜻이리라. 자구 그대로 따진다면 노출 반대가 곧 혐오 발화는 아닐 것이며 호모포비아라고 하기 힘들고, 동성애라는 막연한 개념을 혐오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퀴어포비아라고 부를 수는 있을 듯하다. 이른바 문화시민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퀴어라고 통칭한다면 노출 자제를 요구하는 발언은 호모포비아는 아니라고 해도 퀴어포비아라고는 할 수 있으며 혐오발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혐오발화라면 그 이유는 단순히 퀴어를 배제했기 때문이 아니다. 노출 자제를 요청하는 발언은 노출을 자제하는 퀴어퍼레이드 참가자는 인정하고 혐오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하고 싶다. 어떤 변태는 인정하고 어떤 변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지위, 표현의 적절함을 가를 수 있다는 믿음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적절함과 적절하지 않음을 규정하는 오만한 권력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누가 그에게 그 오만한 권력을 주었는가? 즉 특정 LGBT/퀴어는 인정하지만 어떤 한도를 넘어선 LGBT/퀴어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만큼 오만하고 무례한 말이 없다. 이런 언설은 자신을 판관으로 위치짓는다. 그럼 이 경계를 규정하거나 구분할 판관 권력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특정 집단을 구분하는 권력을 실천하면서 자신은 호모포비아가 아니라고, 즉 그런 권력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지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러니까 노출을 자제해야 한다는 언설은 이성애규범성과 동성애규범성을 가장 충실하게 실천하는 발언이어서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규범에 벗어난, 엇나간, 빗나간 존재를 판별할 수 있고 배제할 수 있는 권력을 실천하는 발언이어서 문제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런 발언을 하는 사람을 퀴어포비아라고, 굳이 포비아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면 그렇게 부르고 싶다.
(하지만 나는 포비아라는 표현 자체를 쓰고 싶지 않다. 뭔가 다른 언어, 표현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노출을 자제해야 한다는 발언보다, 이 발언을 호모포비아라고 규정하는데 분개하는 발언이 더 문제라고 고민한다. 혐오라고 규정하는데 분개하는 감정은 마치 자신을 객관적이고 진심으로 염려하는 것으로 위치짓고 싶어하는 욕망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욕망을 지닌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고 믿는다. 자신을 조금도 성찰하지 않는, 자신의 위치를 단단하게 고정하는 태도기 때문이다. 정말로 퀴어퍼레이드를 염려한다면, 이런 발언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같이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말의 더 정확한 의미는, 지금 나의 발언을 시간이 지났을 때 내가 비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발언 역시 지금 내가 인식하지 못 하는 무언가를 심각하게 놓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