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자는 혐오 대상을 홍보한다

LGBT/퀴어를 혐오하거나 적대하며, 어떻게든 퀴어문화축제 진행을 막으려고 하는 세력에게 고마움을! 특정 집단을 향한 사회적 억압이 강해지고 그와 관련한 보도가 증가하면 이것은 언제나 억압이나 혐오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더욱더 가시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몰랐던 사람은 ‘저런 사람이 있구나’를 깨달으며, 세상에 나와 같은 존재는 혼자라고 믿었던 사람은 ‘나와 같은 사람이 많구나’를 깨닫는다. 물론 각 사건을 접하며 깨닫는 방식, 인식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아무려나 어떤 식으로건 인지하도록 한다. 인지하지 않을 수 없지. 그토록 언론에서 떠드는데. 그러니까 퀴어문화축제는 혐오 집단의 움직이 더 격렬할 수록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 행태가 계속해서 언론에 보도되면서, 더 많이 홍보되기 때문이다. LGBT/퀴어를 어떻게든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은 LGBT/퀴어를 사회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 바로 그런 혐오 집단의 움직임으로 방송에 보도되면서, 바로 그 방송을 보고선 퀴어문화축제를 처음 알고 전화를 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혐오 세력, 혹은 적대 세력의 등장은 혐오의 대상, 혹은 적대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이들의 규모가 일정 이상으로 커지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더 많은 가시성과 운동의 가능성이 발생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지금 순간은 괴롭지만…

글쓰기와 비판 관련 짧은 잡담

ㄱ.
강준만 선생이 실명 비판을 하며 논쟁의 장을 만들고자 했지만, 여전히 학술 논의에서 혹은 다른 어떤 논의에서 실명 비판은 꺼려지는 것이며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논문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라면 그나마 좀 존재하지만 학술대회와 같이 공적 자리에서 행한 언설은 대체로 사적 모임에서 유통될 뿐 공적 논의에서 실명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지금 쓰고 있는 원고에서 정확하게 이 일을 했는데, 즉 학술대회에서 발언했던 내용을 실명으로 인용하며 비평하는 작업을 하는데 어쩐지 많이 부담스럽다. 물론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은 극히 제한되어 있기에 걱정해봐야 큰 문제가 없다는 것 알지만… 냐하하 ㅠㅠㅠ
ㄴ.
그런데 사실 나는 어떤 이론의 한계를 비판하거나, 아쉬운 점을 지적하는 글쓰기가 불편해 한다.
이렇게 말하면 당황하는 분이 많으려나? ;;; 그런데 사실이다. 물론 트랜스젠더 혐오를 비롯한 특정 이슈에 집중할 때면 문헌이나 발언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글 작업을 한다. 하지만 다른 어떤 상황에선 기존 논의 중 뭐가 있고 뭐가 있는데 그 중 ㄱ은 이것이 아쉽고 ㄴ은 저것이 아쉽고 하는 식의 글쓰기는 정말 안 좋아한다.
ㄷ.
출판 예정인 글에서 언급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지만, 글의 흐름 상 결국 언급하지 않겠지. 그래서 여기에 짧게, 정말 짧게 남기면…
여성혐오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글을 읽었는데, 한윤형은 2013년에 출판한 어느 한 글에서 사실상 혐오발화자, 혐오가해자를 두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최철웅은 2015년에 출판한 어느 짧은 글에서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을 가지치기하며 남성연대를 공고히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글에 당황하면 초짜인 것 같지만 당혹스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짧게 맥락 없이 논평하면 각 필자에게 예의가 아니다. 두 저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의가 아니고. 지금 쓰고 있는 원고가 끝나면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논해야겠지. 그것이 내가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예의이고, 나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기본 자세니까.
ㄹ.
어떤 문헌을 직접 비판하거나, 어떤 사람을 직접 언급하며 비판하는 글을 쓰고 있을 때면 늘 몸이 불편하다. 하지만 또 이것이 필요한 순간이 있어 안 할 수도 없다.
미국 힙합씬에선 디스 문화가 상당히 발달해 있는데 한국에선 이런 문화가 별로 없다는 질문에 데프콘은 미국은 땅덩어리가 크지만 한국은 좁아서 그렇다고 답했다. 즉, 미국 서부의 래퍼가 동부의 래퍼를 디스하고 이를 통해 디스전이 발생한다고 해도 이 둘이 직접 조우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평생 안 만날 수도 없다. 하지만 한국은 그냥 만나게 되어 있다. 집회에 나가거나 축제에 참여하거나, 집 구석에 콕 박혀 지내는 것이 아니라면 무조건 수시로 만나게 되어 있다. 국토도 좁지만 씬 자체가 좁아서.
나는 데프콘의 저 분석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그냥 납득이 되었다. 현실이니까. ㄱ이 어떤 문제 있는 논의를 했다고 비판해도, 운동을 하다보면 ㄱ과 같이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꼭 발생한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강준만 선생의 지적은 정확하다. 모두가 서울에 모여 있어서 학문이 발전하지 않고 토론도 불가능하다. “지식 생산은 고립과 관련이”(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68905.html) 있는데 서울에 집중해 있는 현재 상황에선… “제가 서울에 있거나 학문 공동체에 있었으면 할 말 다 못했고 제가 비판했던 사람들과 똑같이 되었을 겁니다.”
ㅁ.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는 태도는 그나마 다행일까? 언젠가 인간관계를 포기해야 작품활동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말은 매우 정확한 것 같다. ‘정확하다’고 단언하고 싶지만 단언하기엔 나는 아직 너무 어리다. 그러니까 어리석다.

바람과 보리의 한순간

며칠 전 바람과 보리가 같이 있는 모습 움짤

잘 누워 있던 바람은 보리가 오자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는… 결국 일어서서 가버렸다는… 후후.
+
몇 년 전까지 사용하던 방식의 글쓰기로 작업을 하고 있다. 뭔가 흥미롭다. 한동안 이렇게 안 했지만, 역시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
자세한 내용은 완성한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