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얼굴을 마주하기

조용한 시기엔 알 수 없다. 아니다. 조용한 시기엔 강하게 의심한다고 해도 분명한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사건이 터졌을 때 분명한 입장과 혐오의 얼굴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를 했을 때 경찰이 진행을 막았다고 들었다. 다시 확인해야 하는 내용이지만 이렇게 기억한다. 그리고 경찰은 해마다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퍼레이드를 할 수 도로를 막기 위해서건 다른 이유에서건 경찰은 계속 참가했다. 장소를 섭외하기 위해 퀴어문화축제 기획단이 엄청나게 고생했지만… 언제나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경찰과 협조하며 퍼레이드를 진행했다.
한 트랜스젠더가 경찰서에 갔을 때, 경찰서 내에 있는 모든 경찰이 트랜스젠더를 구경하러 왔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것이 경찰/국가 공권력의 얼굴 중 하나다.
그리고 작년, 대구와 달리 서울 신촌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서 경찰은 혐오 세력을 방조하며, 사실상 혐오 세력을 지원하고 지지했다. 그런 와중에 5시간에 걸친 퍼레이드를 진행시킨 퀴어문화축제 기획단은 정말 대단한 일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예상해야 했다. 혐오 집단을 지지하는 경찰이 2015년엔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를. 하나의 커다란 사건으로서, 경찰 혹은 공권력이 LGBT/퀴어에게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가 그때부터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니, 더 광범위한 대중을 대상으로 그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법의 얼굴인지, 법을 실행하고 법을 유지시키려는 이들의 얼굴인지, 그 모두인지 둘 중 하나인지 셋 중 하나인지는 분명하게 구분하기 힘들지만, 아무려나 그랬다.
그저 소식만 간헐적으로 듣는 내가 언급하기엔 자격이 없다고 느껴져서 부끄럽다. 남대문경찰서에서 퍼레이드를 위한 신고를 하려고 줄을 서고 있다는 말, 경찰이 혐오 세력과 협상해서/거래해서 집회신고 방식을 바꿨다는 말, 그리고 정당하게 항의방문하려는 퀴어문화축제 및 그 일행을 일방적으로 내동댕이치고 밀쳐내고 그 와중에 누군가는 다쳤다고 들었다. 경찰의 얼굴, 법의 얼굴, 공권력의 얼굴을 확인하는 시간이며 혐오와 결탁한 정권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사실 우리는 경찰의 얼굴, 법의 얼굴, 공권력의 얼굴, 정치권의 얼굴, 정부의 얼굴을 일상에서 마주하고 있다. 다양한 이슈로, 그리하여 내 삶에 걸쳐 있는 복잡한 이슈로 그 얼굴을 마주하며 분노하고 소름끼쳐하고 화를 내고 저항하고 그런다. 그리고 그런 얼굴에서 퀴어 이슈가 또 하나의 분명한 얼굴로 드러났을 뿐이다.
국가마다 LGBT/퀴어를 향한 혐오를 표출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어떤 나라는 진보정당이 LGBT/퀴어 이슈를 정당의 주요 정책으로 다룬다고 하고, 어떤 나라는 LGBT/퀴어 인권의 선진국이라고 불린다. 황당하게도 미국은 LGBT/퀴어 인권의 최첨단을 달린다는 평가도 있다. 그 평가가 옳다면 바이섹슈얼/양성애자와 트랜스젠더는 미국이 상상하는 ‘성적소수자’, ‘퀴어’, ‘LGBT’는 아닌 듯하다. 바이섹슈얼/양성애자와 트랜스젠더에게 미국은 결코 좋은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는 동성애를 혐오하고 사형에 처하는 나라라는 오인도 있다. 극단적으로 나쁘거나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 사이에서 한국은 어디에 위치할까? 혐오 세력과 결탁하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트랜스젠더는 지지하지만 동성애자는 지지하지 않는다’며 LGBT/퀴어 전체를 모독하는 발언(언급하면서 모욕하거나 언급하지 않으면서 모욕하거나)을 하는 한국은 어떤 얼굴로 어느 정도에 위치할까? 말로 안 되는 극단적 평가 사이에서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퍼레이드를 방해하기 위해, 퍼레이드 개최를 막기 위해 애쓰는 경찰과 항의방문자를 밀쳐내며 폭력을 실행하는 경찰이 존재하는 한국의 국가폭력은 어떤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이것을 국가폭력이란 단어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적당한 언어가 아니다. 국가폭력으로 호명하는 순간 이 사건은 매우 모호해지고 전혀 다른 맥락으로 넘어가버린다. 하지만 일단은 이렇게 메모를 해두자.)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런 폭력, 저런 얼굴을 차치하고 그 자리에 있는 활동가와 개인이 걱정이다. 실제로 다쳤듯 또 누군가가 다치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이미 많은 마음이 다친 상황에서 더 많은 상처가 발생하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다. 다들 그렇잖아도 건강이 안 좋은데 건강이 더 상할까 걱정이다. 그렇잖아도 일이 넘치는데 이번 일로 과로하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그리고 또 여러 가지로 걱정이다. 몸이 무겁고 또 무겁다.

혐오자는 혐오 대상을 홍보한다

LGBT/퀴어를 혐오하거나 적대하며, 어떻게든 퀴어문화축제 진행을 막으려고 하는 세력에게 고마움을! 특정 집단을 향한 사회적 억압이 강해지고 그와 관련한 보도가 증가하면 이것은 언제나 억압이나 혐오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더욱더 가시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몰랐던 사람은 ‘저런 사람이 있구나’를 깨달으며, 세상에 나와 같은 존재는 혼자라고 믿었던 사람은 ‘나와 같은 사람이 많구나’를 깨닫는다. 물론 각 사건을 접하며 깨닫는 방식, 인식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아무려나 어떤 식으로건 인지하도록 한다. 인지하지 않을 수 없지. 그토록 언론에서 떠드는데. 그러니까 퀴어문화축제는 혐오 집단의 움직이 더 격렬할 수록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 행태가 계속해서 언론에 보도되면서, 더 많이 홍보되기 때문이다. LGBT/퀴어를 어떻게든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은 LGBT/퀴어를 사회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 바로 그런 혐오 집단의 움직임으로 방송에 보도되면서, 바로 그 방송을 보고선 퀴어문화축제를 처음 알고 전화를 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혐오 세력, 혹은 적대 세력의 등장은 혐오의 대상, 혹은 적대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이들의 규모가 일정 이상으로 커지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더 많은 가시성과 운동의 가능성이 발생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지금 순간은 괴롭지만…

글쓰기와 비판 관련 짧은 잡담

ㄱ.
강준만 선생이 실명 비판을 하며 논쟁의 장을 만들고자 했지만, 여전히 학술 논의에서 혹은 다른 어떤 논의에서 실명 비판은 꺼려지는 것이며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논문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라면 그나마 좀 존재하지만 학술대회와 같이 공적 자리에서 행한 언설은 대체로 사적 모임에서 유통될 뿐 공적 논의에서 실명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지금 쓰고 있는 원고에서 정확하게 이 일을 했는데, 즉 학술대회에서 발언했던 내용을 실명으로 인용하며 비평하는 작업을 하는데 어쩐지 많이 부담스럽다. 물론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은 극히 제한되어 있기에 걱정해봐야 큰 문제가 없다는 것 알지만… 냐하하 ㅠㅠㅠ
ㄴ.
그런데 사실 나는 어떤 이론의 한계를 비판하거나, 아쉬운 점을 지적하는 글쓰기가 불편해 한다.
이렇게 말하면 당황하는 분이 많으려나? ;;; 그런데 사실이다. 물론 트랜스젠더 혐오를 비롯한 특정 이슈에 집중할 때면 문헌이나 발언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글 작업을 한다. 하지만 다른 어떤 상황에선 기존 논의 중 뭐가 있고 뭐가 있는데 그 중 ㄱ은 이것이 아쉽고 ㄴ은 저것이 아쉽고 하는 식의 글쓰기는 정말 안 좋아한다.
ㄷ.
출판 예정인 글에서 언급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지만, 글의 흐름 상 결국 언급하지 않겠지. 그래서 여기에 짧게, 정말 짧게 남기면…
여성혐오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글을 읽었는데, 한윤형은 2013년에 출판한 어느 한 글에서 사실상 혐오발화자, 혐오가해자를 두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최철웅은 2015년에 출판한 어느 짧은 글에서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을 가지치기하며 남성연대를 공고히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글에 당황하면 초짜인 것 같지만 당혹스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짧게 맥락 없이 논평하면 각 필자에게 예의가 아니다. 두 저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의가 아니고. 지금 쓰고 있는 원고가 끝나면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논해야겠지. 그것이 내가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예의이고, 나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기본 자세니까.
ㄹ.
어떤 문헌을 직접 비판하거나, 어떤 사람을 직접 언급하며 비판하는 글을 쓰고 있을 때면 늘 몸이 불편하다. 하지만 또 이것이 필요한 순간이 있어 안 할 수도 없다.
미국 힙합씬에선 디스 문화가 상당히 발달해 있는데 한국에선 이런 문화가 별로 없다는 질문에 데프콘은 미국은 땅덩어리가 크지만 한국은 좁아서 그렇다고 답했다. 즉, 미국 서부의 래퍼가 동부의 래퍼를 디스하고 이를 통해 디스전이 발생한다고 해도 이 둘이 직접 조우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평생 안 만날 수도 없다. 하지만 한국은 그냥 만나게 되어 있다. 집회에 나가거나 축제에 참여하거나, 집 구석에 콕 박혀 지내는 것이 아니라면 무조건 수시로 만나게 되어 있다. 국토도 좁지만 씬 자체가 좁아서.
나는 데프콘의 저 분석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그냥 납득이 되었다. 현실이니까. ㄱ이 어떤 문제 있는 논의를 했다고 비판해도, 운동을 하다보면 ㄱ과 같이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꼭 발생한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강준만 선생의 지적은 정확하다. 모두가 서울에 모여 있어서 학문이 발전하지 않고 토론도 불가능하다. “지식 생산은 고립과 관련이”(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68905.html) 있는데 서울에 집중해 있는 현재 상황에선… “제가 서울에 있거나 학문 공동체에 있었으면 할 말 다 못했고 제가 비판했던 사람들과 똑같이 되었을 겁니다.”
ㅁ.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는 태도는 그나마 다행일까? 언젠가 인간관계를 포기해야 작품활동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말은 매우 정확한 것 같다. ‘정확하다’고 단언하고 싶지만 단언하기엔 나는 아직 너무 어리다. 그러니까 어리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