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를 위한 반대: 퀴어의 공공 노출, 1

오늘 연합뉴스TV에 강명진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장과 기독교의 누군가가 나왔다. 어김없이 노출 이슈가 등장했다. 기독교의 누군가는 “우리 청소년과 우리 아이들”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노출을 하는 퀴어문화축제가 개최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진행자가 질문했다. 노출 문제를 잘 처리하면 퍼레이드 개최에 찬성하느냐고. 누군가가 말하기를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반대를 위해 반대하며, 노출은 그저 핑계일 뿐이라는 자기고백이었다.
작년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가 끝나고 (어김없이) “빤스”차림이 논란이었다. 퍼레이드는 좋지만 굳이 팬티 차림이어야 하느냐라는 질문은 이성애-비트랜스젠더 뿐만 아니라 비이성애-비/트랜스젠더에게서도 나온 반응이었다. 주변에 보기 안 좋고 반대도 심하니 팬티 차림은 하지 말자는 주장이 꽤 많았다.
선암여고 탐정단의 여고생 키스 장면을 두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경고 조치를 했다. 최종 결정을 하던 날, 박효종 위원장은 “동성애는 동성애자들 간의 키스가 아닌 방식으로 얼마든지 우아한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보여준 것은 동성애의 본질 문제와는 거리가 먼 선정적인 표현방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하며 경고 조치를 하는데 강하게 동의했다. 그러니까 이른바 성적으로 보이는, 그리하여 ‘선정적인 표현방식’은 방송이나 공공에 등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매우 규범적이고 단정하여 얼핏 봐선 비이성애자-트랜스젠더인지 확인할 수 없도록 행동하라는 뜻이다.
빤스 논란 역시 마찬가지다. 기독교의 누군가가 밝혔듯, 반대나 비난의 핵심은 팬티 차림이나 노출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반대할 거리, 비난할 거리에 불과하다. 누구도 팬티 차림을 하지 않는다면 부적절한 애정행각을 문제 삼을 것이다. 혹은 다른 무언가를 문제 삼을 것이다. 그러니까 무조건 문제 삼을 것이다. 기독교의 누군가가 말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나는 너희를 무조건 반대할 것이다. 너희가 아무리 점잖게 행동하더라도 공공에 등장하려고 하는 이상, 무조건 반대할 것이다.’
‘우아한’ 혹은 ‘점잖은’ 재현은 존재의 자기 표출이라기보다는 결국 규범이 선호하는 방식에 포섭되면서 이성애가 아닌 것을 결코 공공에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요청과 강하게 공명한다. 그 결과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성애규범적 형상만 미디어와 공공에 존재하겠지. 그리하여 그러한 규범에 부합하며 살 수 있는 계급의 비이성애자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아가겠지만 그렇지 않는 이들의 삶은 지금보다 더 힘들고 때때로 불가능한 삶을 살 것이라고 고민한다.

이론의 자장에 있는 삶

어느 트랜스젠더 이론가는 책을 쓰는 과정에서 편집자에게 다음의 말을 들었다고 했다.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을 모두 학부 수업에서 듣긴 했는데 삶과는 별로 상관이 없더라. 그냥 그건 이론일 뿐이지 삶은 아니라고. 트랜스젠더 이론가는 삶과 무관한 이론에 불과하다는 바로 그 이론이 어떻게 자신의 삶, 그리고 트랜스젠더퀴어의 삶을 설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언어인지를 설명한다. 책 전체를 통해서.
나 역시 그 트랜스젠더 이론가의 말에 동의한다. 남들이 이론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그것이 내겐 내 삶을 설명하는 언어고, 경험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마치 이론과 무관하다고 여기는 삶, 이론과는 무관하거나 별개라고 인식하는 바로 그 삶, 그리고 삶을 그렇게 볼 수 있는 것 역시 이론을 여과한 해석이다. 이론과 삶이 별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을 별개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이론이고 그 이론을 체화한 언설이다.
이론을 벗어난 삶이란 없다고 믿는다. 어떤 것을 이론으로, 어떤 것을 삶으로, 그리고 어떤 언어와 이론으로 삶을 해석할 것인가란 쟁점이 있을 뿐. 모든 삶이 이론화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언어화, 이론화의 외부로 구성된 삶이나 경험, 언어화, 이론화의 내외부를 구축하기 위해 ‘은폐’된 삶과 경험 역시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 역시 이론화의 자장에서 구축된 삶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론이고 저것은 삶이다’는 질문이나 ‘의견’이 아니라 기존 지배 지식을 반복하고 재생산하는 공모 행위다.

과로사하지 않기를

혐오 세력의 패악으로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가 곤란을 겪고 있는 요즘(적절하지 않은 표현을 그냥 사용했다), 나는 혐오 세력의 행태보다 축제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활동가들의 건강이 더 걱정이다. 올 여름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까? 자주 이런 걱정을 한다.

자살로 알려졌던 어떤 집단의 죽음이 일부는 과로사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놀랐었다. 고인에게 안타까움, 살아있는 이들의 괴로움을 떠올리는 동시에 지금 활동가들의 삶이 함께 떠올랐다. 괜찮겠지? 괜찮을까? 괜찮아야 하는데… 무엇이 괜찮은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괜찮다고 판단하는 것이 당사자에겐 최악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무 것도 모르겠다. 그저 건강이 걱정이다. 극심한 스트레스, 분노, 그리고 살인적인 일정으로 인한 극도의 피로를 잘 버틸까? 걱정이다.
부디, 올 여름을 무사히 견디기를…
하지만 내년, 내후년이 또 온다는 점에서 무엇이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선 무엇이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