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아시아 LGBT 컨퍼런스, 감상

[]에 참가했다. 필리핀, 중국의 상하이, 싱가포르, 한국, 이렇게 네 개 국가의 퀴어문화축제/자긍심행진 관련 발표가 있었다. 중요한 배움은 동아시아, 혹은 인접한 아시아 국가라고 해도 역사가 다르고 사회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운동을 전개하는 전략, 방식, 태도가 무척 다르다는 점이다.
스페인, 미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 경험이 있는 필리핀은 스페인 침략 이전에 존재했던 젠더불순응과 젠더위반이 스페인 침략 이후 이원젠더가 사회적 규범으로 변하면서 이들을 남성(성)에 위협으로 인식했다. 물론 이들은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고 존재했다고 한다. 이후 미국의 침략과 지배로 섹슈얼리티 개념이 필리핀 사회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를 배경으로 1994년, 아시아에서는 최초라고 하는 자긍심행진(프라이드 퍼레이드)를 시작했다. 발표자는 이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이후 펀디즈(근본주의자)의 혐오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LGBT 문화와 사회적 여건 역시 개선되고 있다고 했다. 필리핀의 자긍심 행진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LGBT 자긍심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이슈를 같이 발언한다는 점이었다.
중국에선 종교 혹은 믿음을 밑절미 삼은 혐오세력은 없다고 했다. 중국에서 종교 신자 자체가 극히 적을 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가 집회 자체를 금지하고 있어서 혐오자가 모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런 이유로 퀴어 퍼레이드도 불가능하다. 상하이프라이드는 다른 혐오 세력이 아닌 중국 정부의 혐오와 싸우고, 중국 정부의 규제와 협상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상하이프라이드는 여타의 프라이드 행진과 달리 대규모로 모이는 행사를 진행하는 대신 달리기, BBQ 행사 등 다른 방식의 축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아울러 모든 지역의 정부가 자긍심 행사를 허락하는 것도 아니며 후난성의 경우엔 주최측 중 일부가 정치적 의견이 평소 급진적이라며 행사 자체를 불허했다고 한다. 따라서 자긍심행진, 혹은 축제를 개최하기 위해선 평소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어떻건 중국 정부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정치적 입장을 표현해야 하고, 그 범위 내에서 행사를 기획해야 한다. 중국 정부의 검열과 규제 내에서 어떻게 프라이드를 이야기할 것인가를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고, 그 고단함이 읽혔다.
싱가포르는 또 상황이 달랐는데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가 네델란드의 지배를, 다음엔 영국, 그 다음엔 일본, 다시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했다. 그리고 영국의 침략 지배가 끼친 효과 중 하나는 형법 377A조, 남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이다. 이 조항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조항을 폐지하려는 캠페인을 진행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고. 또한 싱가포르는 공공 장소에서 표현의 자유가 허가된 곳이 한 곳 뿐이며 사람들이 집회를 한다고 해서 참가할 사람은 없다고, 핑크닷 주최측은 예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게, 현재의 가족 질서에서 최대한 스며들 수 있는 전략을 선택했고, 유일하게 표현의 자유가 허가된 공원에 핑크색 옷을 입고 모이기로 했단다. 즉, 핑크색 옷을 입은 사람 한 명 한 명이 핑크닷인 모습을 구현하는 것. 처음엔 2500명이 모였는데 작년엔 2만 명이 모이는 규모로 성장했다고 한다.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2009년에 처음 시작해서 2011년까지는 낮에 행사를 진행했는데 사람이 늘어나 인구밀집이 발생하자 너무 덥다는 반응이 나왔다고. 그래서 야간에 행사를 진행했는데 이게 정말 예쁜 풍경을 만들었다. 사진은 여기서, 2014년의 행사 동영상은 여기. 동영상은 꼭 보시기를. 야간에 진행하는 행사가 어떻게 멋지게 기획될 수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한국은 대충 아시려니 하며 생략을…
정말 대충 정리했지만 사회적 배경에 따라 행사를 기획하는 방식, 전략을 짜는 방식이 전혀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러한 행사는 발표자가 이해하는 방식의 재현이란 점이다. 아마 다른 단체의 다른 발표자가 나왔다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을 거라고 믿는다. 이런 행사에 참가할 때마다 고민하지만,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자의 발표 내용이 계속해서 대표 재현되는 상황, 영어를 사용하지 못 하지만 전혀 다른 입장과 전혀 다른 급진적 정치학을 실천하는 목소리는 다른 언어권에서 공유되지 못 한다는 점은 정말 중요한 이슈다. 이런 중요한 이슈가 남아 있긴 하지만, 올 들어 한국이 아닌 지역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해서 한국을 하나의 지역으로, 그러면서 인접 국가와 어떤 접점을 형성하는 지역으로 상상하는 법을 몸으로 배우고 있다는 점에서 즐거운 자리였다.
그나저나 그 많은 신청자가 왜 안 왔을까?

소득 수준과 후원, 기부의 관계…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 조사” 초판을 슬쩍 봤을 때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다. LGBTI 관련 단체에 후원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의 경제적 상태를 조사했더니 소득이 낮을 수록 후원이나 기부를 더 많이 하고 있으며 소득이 높을 수록 후원이나 기부를 더 적게 하고 있었다. 하층의 22%가 후원이나 기부를 하거나 했다면 상층은 단지 7%였다. 동시에 LGBTI 커뮤니티의 역량 강화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복수응답자 중 두 번째로 많은 45%가 개인적 성공과 성취였고, 인권 단체 활동 후원은 24%였다.
이러한 조사 내용은 정말 많은 것을 고민하도록 한다. 소득 수준이 낮을 수록 후원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은 소득이 높을 수록 인권단체의 활동이 아니라 소득 수준으로 자신의 불안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일까? 사회적 위험과 위협 요소에 대비하는 거의 유일한 조건이 소득 수준이기 때문에 이런 것일까? 알 수 없다. 개개인의 차이가 상당하기에 내가 함부로 예단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그런데 커뮤니티 역량 강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로 두 번째로 높은 응답은 ‘개인적 성공과 성취’였다. 나는 궁금했다. 개인의 성공과 성취가 커뮤니티의 역량을 강화하는데 어떤 도움이 될까? 개인의 성공과 성취가 커뮤니티의 역량을 강화로 이어지기 위해선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노력이 없다면 개인의 성공과 성취는 그냥 개인의 성공과 성취다.
나는 후원이나 기부 경험에 있어 소득이 적을 수록 후원 경험이 많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다른 말로 소득이 적을 때 1,000원이건 5,000원이건 10,000원이건 후원이나 기부를 경험한 사람이 소득이 늘어나고, 개인이 성공하고 성취를 했을 때도 기부나 후원을 한다고 믿는다. ‘지금은 내 소득이 이것 뿐이니까 나중에 두 배 이상으로 벌면 그때 후원을 해야지’라는 마음가짐은 무척 훌륭하지만, 슬프게도 소득이 두 배로 늘어나면 생활소비 방식도 달라져서 후원을 할 여유가 쉽게 생기지는 않는다. 월 소득 30만 원일 때 5,000원이라도 후원을 해본 사람이 소득이 100만 원일 때도 후원을 한다. 물론 누구나 반드시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있고 그 비용을 중심으로 소득을 분배한다. 그러니 함부로 이야기할 부분은 아니다. 그럼에도 약간의 여유를 만들어서 후원과 기부를 시작할 때 개인의 성공과 성취도 공동체의 것으로 의미를 갖는다.
그냥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여기로

혐오 혐오

혐오 관련한 글을 읽고 있노라면 그 정의와 관련하여 끝없는 순환에 빠진다. 아니 그 전에 혐오는 嫌牾인지 嫌惡부터가 헷갈린다. 혐오의 두 가지 의미로 인해 인간을 향한 혐오와 곤충을 향한 혐오를 동급으로 두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렇진 않겠지. 아무려나 혐오가 嫌牾인지 嫌惡인지 헷갈리지만, 혐오는 규정되기 힘든 언어인가 싶을 때가 있다.  “**혐오는 **을 향한 적대, 증오, 공포”라고 정의되는 일이 많은데 이럴 때 적대, 증오, 공포는 또 무슨 뜻일까? 이들 각각은 어떤 식으로 정의/규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고민에 있다보면, 사전적으로 이들 용어는 끊임없이 순환고리에 빠진다. 혐오를 알려면 증오를, 증오를 알려면 공포를, 공포를 알려면 적대를, 적대를 알려면 혐오를 알아야 하는 식이다. 우으으.

그러고보면 혐오 관련한 글에서 정작 그 혐오가 무엇을 뜻하는지 규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여성혐오”는 정확하게 무슨 뜻일까? 직관적으로는 알겠지만 정확한 뜻은 모르겠다. 아울러 트랜스혐오를 논할 때면 언제나 성차별주의와 동성애혐오를 함께 이야기하지만, 동성애혐오를 이야기할 땐 트랜스혐오를 언급하지 않으며, 여성혐오를 이야기할 땐 때때로 동성애혐오와 별개로 다룬다. 동성애혐오를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동성애자 자신도 바이혐오는 공공연히 한다. 왜일까? 이런 구분은 어떤 이유로 발생하는 것일까? 이것은 차별의 수위, 억압 받는 정도를 표지하는 것일까? 이런 저런 고민이 후두둑 쏟아진다.

그러니까 어려운 문제다. 당연한 말이지만 정말 어려운 문제다. 온갖 학문을 다 파헤쳐도 이해할 수 있을까 말까한 주제다. 그래서 재밌고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