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혐오

혐오 관련한 글을 읽고 있노라면 그 정의와 관련하여 끝없는 순환에 빠진다. 아니 그 전에 혐오는 嫌牾인지 嫌惡부터가 헷갈린다. 혐오의 두 가지 의미로 인해 인간을 향한 혐오와 곤충을 향한 혐오를 동급으로 두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렇진 않겠지. 아무려나 혐오가 嫌牾인지 嫌惡인지 헷갈리지만, 혐오는 규정되기 힘든 언어인가 싶을 때가 있다.  “**혐오는 **을 향한 적대, 증오, 공포”라고 정의되는 일이 많은데 이럴 때 적대, 증오, 공포는 또 무슨 뜻일까? 이들 각각은 어떤 식으로 정의/규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고민에 있다보면, 사전적으로 이들 용어는 끊임없이 순환고리에 빠진다. 혐오를 알려면 증오를, 증오를 알려면 공포를, 공포를 알려면 적대를, 적대를 알려면 혐오를 알아야 하는 식이다. 우으으.

그러고보면 혐오 관련한 글에서 정작 그 혐오가 무엇을 뜻하는지 규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여성혐오”는 정확하게 무슨 뜻일까? 직관적으로는 알겠지만 정확한 뜻은 모르겠다. 아울러 트랜스혐오를 논할 때면 언제나 성차별주의와 동성애혐오를 함께 이야기하지만, 동성애혐오를 이야기할 땐 트랜스혐오를 언급하지 않으며, 여성혐오를 이야기할 땐 때때로 동성애혐오와 별개로 다룬다. 동성애혐오를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동성애자 자신도 바이혐오는 공공연히 한다. 왜일까? 이런 구분은 어떤 이유로 발생하는 것일까? 이것은 차별의 수위, 억압 받는 정도를 표지하는 것일까? 이런 저런 고민이 후두둑 쏟아진다.

그러니까 어려운 문제다. 당연한 말이지만 정말 어려운 문제다. 온갖 학문을 다 파헤쳐도 이해할 수 있을까 말까한 주제다. 그래서 재밌고 신난다.

소비를 전시하기

블로깅을 뭐할까 고민하며 E와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빈에서 사온 초콜릿 이야기는 어떻겠느냐는 말이 나왔다. 앞으로 언제 다시 빈에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나로선 정말 드문 경험이기에 나쁘지 않은 블로깅이겠지만 이것이 결국은 소비를 통해 존재를 전시하는 것이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일전에 어느 싸이트에서 LGBT/퀴어 관련 액세서리를 한참 구경했다. 이거 예쁘다, 이걸 착용하면 퀴어로 간지나게 전시하겠다 등. 무수하게 많은 상품과 정말 사고 싶을 정도로 잘 만든 상품. 이런 것을 착용하면 나는 나를 ‘퀴어’로 엣지있게, 폼나게, 간지나게 전시할 수 있는 것일까? 계속해서 구경하다가 어느 순간 화가 났다. 퀴어함의 전시는 어떤 식으로건 소비를 통하지 않고는 어려운 것일까? 물론 젠더표현이 이렇게 단순한 실천이 아니고, 소비를 매개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기에 이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할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손재주가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뭔가 폼나는 엑세서리를 착용하려면 소비를 거쳐야 한다. (더 정확하게는 소비를 거치지 않으면서 엑세서리를 만드는 상상력 자체를 나는 잃어버렸다. 이것이 가장 문제고 슬픈 일이다. 나는 이미 소비주체다.) 장식을 소비하지 않고도 자신의 퀴어함을 얼마든지 표현하고 전시할 수 있는데, 퀴어 관련 상품은 정말로 많다. 괜히 핑크산업이겠느냐만.
한국에서 비건으로 살며 초콜릿을 먹기란 정말 쉽지 않다. 카카오 70% 이상의 씁쓸한 맛을 살펴보거나(그 중에도 우유가 들어가는 게 있다), 채식상품을 파는 곳에서 구매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후자, 채식쇼핑몰 사이트에서 파는 제품은 대체로 비싼데, 조금 과장해서 아이허브에서 파는 금액의 3배 가량이다. 체크카드가 있다면 외국에서 결제할 수 있는 카드를 발급받아서 아이허브에서 구매하는 게 훨씬 저렴하다. 다른 건 모르겠고, 비건으로 좀 잘 먹으면서 건강하면서 절약을 하고 싶다면 국내 사이트보다 아이허브를 통하는 게 더 낫다. 아무려나 누구나 외국 사이트에서 결제를 할 수 있는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란 점에서, 비건으로 초콜릿이나 다른 맛난 것을 먹기 위해선 결국 또 특정 방식의 소비를 전시해야 하는 것일까란 고민이 든다.
빈에서 구매한 초콜릿의 종류별 맛을 떠드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나는 가끔 누군가가 한국에선 결코 구할 수 없는 비건 초콜릿을 품평하는 글을 읽을 일이 있는데 그때마다 몸이 좀 복잡했다. 이것을 지금은 제대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비건이라면 이 정도는’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때가 있달까.(‘퀴어라면 이 정도는 소비해야지.’) 사실 내가 정크비건을 고집하는 건 여러 이유가 있는데, 실제 내 입맛이 정크푸드를 사랑하거니와 건강 운운하는 글을 읽고 있노라면 추가의 노동과 더 많은 구매력을 갖추어야만 가능하단 점을 깨닫기 때문이다. 계급문제다. 나 같은 사람으로선 그런 건강한 채식 생활은 실천하기 어려운 것에 가깝다.
물론 나 역시 늘 무언가를 전시한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엔 껄끄럽고 내가 설정한 윤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일 땐 전시하지 않는 편이다. 그 한계가 무엇이며, 어떻게 규정되는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이 글이 무척 마음에 안 드는데, 너무 거칠고 또 부족함 투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제대로 고민을 안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거친 끄적거림을 남겨두면서…
딱 하나. 내가 정말 전시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글을 잘 쓰게 되어서 내 글을 전시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블로그를 통해 내가 전시하고 싶은 것, 그래서 부러움을 유발하고 싶은 것은 글이다. 하지만 나의 글은 부러움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유발할 뿐이다. 그러니 아직 한참 멀었다. 더 많이, 더 꾸준히 써야겠지.

공부를 한다는 것, 산다는 것: 가사노동과 트랜스젠더퀴어 정치

급여가 들어오자 나는 곧장 “그때 그 고향에서 먹었던 그리운 맛!”인 호주산 병아리콩을 비롯한 몇 가지 식재료를 주문했다. 책이나 다른 것을 모두 미루고 식재료부터 주문했다.

그리고 주말을 이용해서 마늘고추장을 만들었다. 마늘이 면역력에 좋다고 해서, 알러지에도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으로 요즘 마늘을 자주 찾고 있다. 마늘을 좀 더 쉽고 맛나게 먹기 위해 다음 일주일 동안 먹을 반찬으로 마늘고추장볶음을 만들었다.

매주 주말이면 하루 날을 잡아서 그 다음 일주일 동안 먹을 반찬을 만든다. 반찬을 만들고 있으면 시간은 정말 금방 흐른다. 요리건 조리건 어쨌거나 서툰 나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점심 식사 준비, 반찬 만들기, 설거지까지 합치면 너댓 시간도 금방 흐른다. 논문을 읽었다면 엄청 많은 분량을 읽었을 시간이지만 나로선 이 작업을 해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나 역시 종종 이런 표현을 쓴다. 하지만 내가 여러 종류의 곡물을 사서 밥을 하고, 그것을 한끼 분량을 나눠서 냉동실에 보관하는 일, 일주일 동안 먹을 반찬을 만드느라 너댓 시간을 소비하는 일은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공부하기 위해서다. 가사노동은, 그리고 때때로 이곳에 올리는 요리/조리 사진은 내가 무얼 먹었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가사노동을 하고 있는지, 가사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그 경험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니까 식재료를 사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 일은 모두 내가 연구를 하거나 고민을 하거나 공부를 하는 과정이다. 이 모든 작업이 내 글쓰기의 일부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내 글쓰기에서 혹은 나의 말하기에서 이런 노동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 한다. 나의 고민이 짧아서 이 경험을 트랜스젠더퀴어 이론에 충분에 녹여내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내 삶의 경험에서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식당에서 무엇을 소비했는지가 아니라 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가사노동을 했는지는 더 많이 드러나야 하는 경험이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은 ‘어머니’나 ‘아내’가 하는 가사노동에 비하면 새발에 피다. 정말 나는 최소한으로 줄여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많은 노동이, 이곳에 오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듯, 은폐되고 글에서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관찰자 혹은 논평가로서 평하는 글만 가득할 뿐이다. 종종 고민한다. 이 경험을 트랜스젠더퀴어 이론에서 어떻게 엮어 낼 수 있을까? 이성애-비트랜스여성만이 가사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퀴어 정치학에서 가사노동을 어떻게 퀴어이론으로 엮어낼 수 있을까? 분명 누군가는 논했겠지. 내가 게을러서 찾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궁금하다. 이 경험을 어떻게 트랜스젠더퀴어 정치학으로 직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