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여가 들어오자 나는 곧장 “그때 그 고향에서 먹었던 그리운 맛!”인 호주산 병아리콩을 비롯한 몇 가지 식재료를 주문했다. 책이나 다른 것을 모두 미루고 식재료부터 주문했다.
그리고 주말을 이용해서 마늘고추장을 만들었다. 마늘이 면역력에 좋다고 해서, 알러지에도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으로 요즘 마늘을 자주 찾고 있다. 마늘을 좀 더 쉽고 맛나게 먹기 위해 다음 일주일 동안 먹을 반찬으로 마늘고추장볶음을 만들었다.
매주 주말이면 하루 날을 잡아서 그 다음 일주일 동안 먹을 반찬을 만든다. 반찬을 만들고 있으면 시간은 정말 금방 흐른다. 요리건 조리건 어쨌거나 서툰 나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점심 식사 준비, 반찬 만들기, 설거지까지 합치면 너댓 시간도 금방 흐른다. 논문을 읽었다면 엄청 많은 분량을 읽었을 시간이지만 나로선 이 작업을 해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나 역시 종종 이런 표현을 쓴다. 하지만 내가 여러 종류의 곡물을 사서 밥을 하고, 그것을 한끼 분량을 나눠서 냉동실에 보관하는 일, 일주일 동안 먹을 반찬을 만드느라 너댓 시간을 소비하는 일은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공부하기 위해서다. 가사노동은, 그리고 때때로 이곳에 올리는 요리/조리 사진은 내가 무얼 먹었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가사노동을 하고 있는지, 가사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그 경험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니까 식재료를 사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 일은 모두 내가 연구를 하거나 고민을 하거나 공부를 하는 과정이다. 이 모든 작업이 내 글쓰기의 일부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내 글쓰기에서 혹은 나의 말하기에서 이런 노동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 한다. 나의 고민이 짧아서 이 경험을 트랜스젠더퀴어 이론에 충분에 녹여내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내 삶의 경험에서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식당에서 무엇을 소비했는지가 아니라 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가사노동을 했는지는 더 많이 드러나야 하는 경험이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은 ‘어머니’나 ‘아내’가 하는 가사노동에 비하면 새발에 피다. 정말 나는 최소한으로 줄여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많은 노동이, 이곳에 오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듯, 은폐되고 글에서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관찰자 혹은 논평가로서 평하는 글만 가득할 뿐이다. 종종 고민한다. 이 경험을 트랜스젠더퀴어 이론에서 어떻게 엮어 낼 수 있을까? 이성애-비트랜스여성만이 가사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퀴어 정치학에서 가사노동을 어떻게 퀴어이론으로 엮어낼 수 있을까? 분명 누군가는 논했겠지. 내가 게을러서 찾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궁금하다. 이 경험을 어떻게 트랜스젠더퀴어 정치학으로 직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