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약, 적녹색약과 청황색약

갑자기 속이 쓰려서 블로깅을 하기 힘드니 대충…
이 기사를 읽으며, 내가 지하철 노선도를 볼 때마다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를 깨달았다. 무슨 구분이 가야지… -_-;;; 그런데 나로선 재밌는 게, 늘 불편하고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불편했는데 이것이 불편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암튼 이 기사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한 사실은 내가 적녹색약일 뿐만 아니라 청황색약이란 점이다. 색약 관련 많은 글이 이렇게 자세하지 않아서 몰랐달까. 예시로 나온 다섯 가지 검사지 중에서 1, 3, 4, 5번 모두 못 읽어냈다. 1번은 21이 보일 때도 있고 안 보일 때도 있다. 5번은 아예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색깔의 난수표 같달까. 트랜스젠더고 뭐고 상관없이 일단 대한민국 인구 대비 0.3% 확정. 후후.
그나저나 나의 입장에서, 저런 색깔의 난수표 같은 검사지에서 1, 3, 4, 5번의 숫자가 보인다는 게 더 신기해. 어떻게 그게 보이지? 어떻게 그렇게 볼 수 있지?
그러니까 나의 색약이 꼭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같고,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같다.

잡담 이것저것

ㄱ.
범죄와 엮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올 한 해는 혐오가 주제어구나 싶다. 아아… 그리고 혐오를 주제로 글을 쓴다면 ‘우리 이렇게 혐오 받고 있다’거나 ‘혐오가 이런 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혐오가 이렇게 구조적으로 팽배하다’란 식의 글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식의 글이 분명 필요하고, 나 자신이 이런 주제로 글쓰기 작업을 할 필요가 있지만 지금 내가 쓰고 싶은 스타일의 글은 아니다. 아마도 “헐… 이게 뭐야…”라는 반응과 함께 무시 당할 법한 그런 글을 쓰겠지. 후후후. 이전의 많은 글이 그러하듯이. 후후후.
ㄴ.
한국어로 쓴, 한국의 퀴어 활동가가 쓴 퀴어 관련 글을 읽다 보면 ㅎ님이 레즈비언의 역사를 정리한 글이 무척 많이 인용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딱 그 뿐이다. ㅎ님이 정말 많은 글을 썼고 각 글에서 중요한 인식론적 전환을 위한 작업을 했지만 인용되는 글은 역사를 정리한 글이며, 이론이나 인식론을 위한 근거는 모두 미국이나 영국 이론가, 프랑스 철학자의 것에서 가져온다. 한국 퀴어 연구자가 쓴 글은 데이터를 제공하는 자료고 서구 이론가의 글은 인식론이자 이론이라는 뜻일까? 꼭 이런 이유는 아니겠지만 역사를 정리한 글만 인용되고 중요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글은 인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계속해서 의심을 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지혜 선생님의 영향이 정말 가득한 논문인데 정작 지혜 선생님의 논문은 인용하지 않고 지혜 선생님이 쓴 논문에서 인용된 저자의 글만 인용한 논문을 본 적도 있다. 왜일까?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 탈식민은 불가능한 것만 같다.
ㄷ.
E와 이야기를 나누며 정말 많은 것을 배운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고민이 섞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고민을 나누며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 있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그냥 나는 내 공부를 묵묵히 하면 된다. 그 뿐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순간 망한다. 이것은 확실하다.

공부는 언제나 티가 난다

살다보면 정말 ‘천재’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 존재한다. 천재의 재능은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임을 실감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공부는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붙잡고 산다. 석사과정에 있을 때 어느 선생님이 한 말씀인데, 공부는 노력한 만큼 그 성과를 드러낸다고 했다. 성실하게 공부를 열심히 하면 천재의 영역에 도전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 자신 여전히 껠바사서 아직 그 경지를 모른다. (주변엔 엄청나게 성실하게 공부하고 또 똑똑한 사람이 여럿이라 나 따위 정말 별것 아니다.) 하지만 책 한 권, 혹은 논문 한 권을 더 읽으면 그것은 글에서 바로 티가 난다. 그리고 더 무서운 점은 공부를 게을리하는 순간 게으른 티가 매우 분명하게 난다는 점이다. 사실 이것이 가장 무섭다. 내가 얼마나 공부를 안 하는지를 대면하는 순간이 가장 무섭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티가 난다는 말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무섭도록 선명하게 티가 난다는 말과 같다. 열심히 해도 부끄러운데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얼마나 더 부끄러운가. 슬프게도 나는 늘 이 엄청나게 부끄러운 순간을 조우하며 살고 있다. 껠바사 터진 인간의 부끄러움. 언제 즈음이면 조금이나마 덜 부끄러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