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있을 수 있다’와 ‘있다’ 사이의 간극

오랜 만에 특강을 하고 왔다. 2007년 처음으로 특강을 했으니 이제 햇수로 9년째지만 일년에 기껏해야 3~4번 강의를 하는 나로선 여전히 강의 자체가 부담스럽다. 글을 쓸 기회가 생기면 기뻐서 좋아하지만 강의를 할 일이 생기면 어지간하면 다 받지만 그럼에도 무척 부담스럽다. 오늘도 그랬고 가고 싶지 않아서, 가는 버스에서 깜빡 잠들어 아주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강의 자체는 무난하게 끝났다.
강의를 할 때면 이 자리에, 이 강의실에 동성애자, 양성애자, 이성애자, 무성애자, 트랜스젠더, 젠더퀴어 등이 그냥 있다고 미리 말하고 시작할 때가 있다. 이때 핵심은 ‘있을 수 있다’가 아니라 ‘있다’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론이다. ‘있을 수 있다’는 없음을 전제하지만 그럼에도 염두는 두겠다는 오만함이다. 비교를 하자면 외국으로 여행을 가는 일을 외국여행으로 말하느냐 해외여행으로 말하느냐와 같은 차이기도 하다. 뉴스를 들어도 해외여행이라는 말을 매우 빈번하게 사용하는데 이 말은 제주도를 한국의 영토가 아니라고 가정한다. 제주도 뿐만 아니라 많은 섬을 한국의 영토가 아닌 것으로 사유한다. ‘있을 수 있다’는 이런 것이다.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가 아니라 ‘있을 수 있으니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존재를 적극 사유하는 언설이 아니다. 기존의 지배 규범과는 다른 식의 입장으로 말하는 태도도 아니다. 그냥 기존의 지배 규범에 부합하는 언설이다. 그래서 나는 강의를 할 때면 ‘이 자리에 양성애자, 동성애자, 이성애자, 무성애자, 트랜스젠더, 젠더퀴어 등이 있으며, 정확하게 이 측면에서 말을 하겠다’고 말하곤 한다.
오랜 만의 강의 치고는 나름 재밌었고 질문도 좋았다. 수강생 중에선 한 명만이 질문을 했는데 섹스-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성이 없다면 이성애, 동성애 등도 흔들리고 불가능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정말 멋진 질문이었다. 정말 좋은 질문이라고 칭찬을 해주며, 성적지향을 섹스(란 것이 있다고 가정할 때)로 설명할 때, 이원젠더로 설명할 때, 젠더로 설명할 때를 나눠 다시 이야기했다.

비, 젠더와 인종

비가 쏟아지는 지하철 출구에서 잠시 머물고 있다. 우산은 있지만 작고 약한 재질이라 이런 비를 충분히 막지 못 한다. 옷과 가방이 다 젖겠지. 그냥 좀 쉬었다가 비가 그나마 적게 내리면 그때 출발해야지.
ㅅㅇ의 이메일을 받고 쓰지 않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빈/비엔나에서 자주 “마담”이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것이 나의 동아시아인 인종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궁금했다. 미국의 경우 동아시아인은 상대적으로 작은 덩치와 ‘덜’ 남성스럽다는 독해로 인해 자주 게이로 인식된다고 한다. 그리고 캐나다에 다녀온 ㅋㄷ의 관찰에 따르면 이른바 백인이나 흑인에 비해 동아시아인 mtf가 상대적으로 적은 덩치에 따라 여성으로 통하기 쉬워 보였다고 했다(이 문장은 ㅋㄷ의 진술과 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북미의 이야기지만 덩치 등의 차이가 야기하는 이슈는 젠더 실천과 젠더 표현에서 매우 중요한 측면이다. 물론 빈/비엔나는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인이라는, 쉽게 인지되는 외모는 나의 젠더를 해석함에 있어 어떤 식으로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마담”이라는 말은 단순히 나의 젠더 실천, 젠더 재현의 이슈가 아니라 나의 인종과 얽힌 독해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연하지. 언제나 젠더 실천은 인종과 얽혀 있는데. 그렇다고 이것을 인종차별이라거나 인종에 따른 편견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종에 따른 편견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젠더가 어떻게 인종에 따른 사건이고 독해인지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다시 확인하고 싶은 것 뿐이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고 종종 폭우가 내린다. 끄응…
더는 기다릴 수 없어 그냥 비를 맞으며 집으로 왔다. 비가 그만 내렸으면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다. 옷이 다 젖었고 가방도 대충 젖었다. 가방이 안 젖도록 노력했지만 별무소용. 끄응.
아무려나 ㅅㅇ가 한국으로 오면 재밌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 기대가 크다. 아… 블로깅하기 전에 답장을 해야 하나…;;;

나의 젠더는 나의 상황이다

김밥가게에 가서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이미 요청 받은 김밥이 있었지만 그냥 한 번 살펴봤다. 나를 등지고 있던, 김밥을 마는 분이 내게 “언니, 포장할 거예요?”라고 물었다. 얼른 돌아서며 “네”라고 답을 했다. 돌아선 나를 보는 그 분의 표정은 당혹감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막연하게 내가 가늠하기에 ‘언니’인지 ‘삼촌’인지를 다시 확인하려는 표정이었다.
일전(그래봐야 얼마 안 되었다)에 나를 보고 ‘겉으로 보면 완전 남자지’라고 했던 분이 있다. 그런데 그 후 며칠 뒤 멀리서 나를 보고 다가오더니 ‘여자인줄 알았다’고 했다. 그 사이에 내가 특별히 바뀐 것은 없다. mtf 혹은 트랜스젠더란 걸 명확하게 알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순간엔 남자로 보이고 어떤 순간엔 여자로 보였다는 뜻이다.
정확하게 이것이 나의 젠더다. 내가 재현하고 싶고 실천하고 싶은 젠더다. 물론 아직은 부족하다는 느낌이고 좀 더 헷갈림을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헷갈림은 내가 선택하거나 기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려나 어떤 혼란, 헷갈림, ‘다른’ 해석을 야기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젠더, 남자라고 해석했다가 여자라고 해석했다가, 언니라고 부르고선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도록 하는 바로 그 젠더가 나의 젠더다. 흔한 말로는 트랜스젠더라고 혹은 젠더퀴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어떤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범주의 언어가 아니라, 그냥 이런 경험, 일상의 실천에서 포착되는 상황이 나의 젠더다. 나의 젠더는 나의 상황이며, 나의 상황은 나의 젠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