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이곳에 오고 처음으로 혼자 외출을 했다.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란 비건으로 향했고 낯선 지하철/도시철도로 인해, 그리고 한국과는 다른 블록 개념으로 길을 잘못 들기도 했지만 마란 비건으로 무사히 도착했다. 그리고 느낌은… 오오오! 베간즈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여기가 진정 비건을 위한 곳이구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음식과 식재료가 있었다. 베간즈와 같은 것도 있고 베간즈에 있는 것이 없기도 하고 없는 것이 있기도 했다. 한참을 구경하며, 하지만 많이 구매하지는 못 하고(짐 무게도 고려해야 하니) 빵을 두 개 사서 돌아왔다. 빵은 확실히 맛났다. 한국의 더 브레드블루도 나쁘지 않지만(아니 여기에 오기 전까진 괜찮은 곳이었지만) 아무래도 맛의 차이가 좀 났다.
ㄴ. 어제 베간즈에서 조각 케익을 샀고 아침으로 그것을 먹었다. 아아, 오래 오래 기억이 날 맛이었다. 아마도 정말 오랜 시간 그 맛을 떠올리며 빈에 다시 오고 싶겠지.
ㄷ. 점심은 호텔에 있는 별도의 식당에서 먹었는데… 음… 다시는 먹지 않는 것으로. 여기 와서 처음으로 음식 맛이 별로였다. 돈 아까워.
ㄹ. 낮에 ㅈㅇ님을 만나서 프로이트 박물관으로 향했다. 아침에 이미 길을 한 번 잃어서인지 길을 잃지 않고(사실 출발점에서 길을 물어보고 갔으니까) 도착했다. 한국의 모텔 같은 곳에서 사용할 법한 표지판이 프로이트 박물관의 위치를 분명하게 알려줬다. 박물관은 2층에 위치하지만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벽에 프로이트의 생애를 간단하게 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살았던 곳을 박물관으로 만든 이곳엔 홈비디오를 편집하고 안나 프로이트가 설명을 덧붙인 비디오, 프로이트를 전반적 생애, 그리고 생애를 가늠할 수 있는 각종 사진과 문서, 프로이트가 사용했다는 물건, 프로이트의 논의를 상기시킬 조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진마다 번호를 붙여서 각 기록물의 의미를 설명하는 책자를 별도로 비치했을 뿐만 아니라 각 방의 번호를 누르면 음성으로 설명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 모든 모습을 보며, 퀴어 아카이브 전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ㅁ. 프로이트 박물관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빈의 게이, 레즈비언 서점 Löwenherz이 있어서 그곳으로 이동했다. 겉에서부터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인데, 내부의 자료가… 오오오. 게이 포르노와 게이 누드집, 게이 누드 엽서가 한가득이었다. 이 지점이 분명하게 흥미로웠는데 게이와 레즈비언이 몸을 표현하거나 노출하는 방식이 무척 달랐다. 게이 포르노는 수십 종이 있었는데 반해 레즈비언 포르노는 한 종류 정도만 있었고, 게이 잡지는 포르노가 대부분이었다면 레즈비언 잡지는 정치적 의제를 주로 다루고 있는 인상이었다. 게이포르노를 종류마다 한 권씩 구매하고 싶었지만 자금의 문제로 딱 한 종류만 구매했고, 레즈비언 포르노를 몇 권 구매했다. 서점 측에 허락을 구하고 여러 모습을 촬영했는데, 확실히 이런 분위기가 부러웠다. 개별 관계에선 음란해도 정치적으로는 건전한 문화 시민 되기만을 주장하는 한국의 분위기와, 여러 정치적 입장과 함께 이렇게 성적 욕망, 몸의 표현 등을 좀 더 적극적으로 출판하는 오스트리아/빈의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다른 점이 내겐 어떤 아쉬움이었다.
잠깐 추가하면, 트랜스젠더와 바이 책도 적잖아 있었음에도 홍보 문서엔 게이 레즈비언 서점이라고 나와 있어서 몸이 복잡했다.
ㅂ. 한참을 구경한 다음 바로 옆에 있는 Berg Cafe라고, 게이 레즈비언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 그냥 티는 나지만 그렇다고 엄청 특별하게 다르다거나 그런 건 없는 그냥 카페.
ㅅ. 저녁을 먹기 위해 Lebenbauer Vollwert Restaurant로 향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아마 마지막으로 비건 식당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번에도 길을 헤매지 않고(어제는 구글 지도를 전체적 모습만 찍어왔다면, 오늘은 아예 자세하게 확대한 모습을 일일이 다 찍어서 준비했으니까… 흐) 무사히 도착했다. 고급 레스토랑 분위기여서 잠시 망설였지만 뭐 어때. 기본 식사는 비건인 듯하며, 디저트도 비건 음식이 꽤나 있었다. 음식이 약간 짜다는 것만 빼면, 무척 맛있었다. 밥과 디저트를 먹으며, ㅈㅇ 님과 연구와 관련한 온갖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늦어졌고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빈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이용해서 호텔로 돌아왔다.
ㅇ. 빈/오스트리아의 대중교통 시스템과 관련해서 꼭 해야 하는 이야기. 한국은 지하철을 타기 위해, 버스를 타기 위해선 꼭 표나 카드를 찍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그냥 양심에 맡기는 시스템이라 누구도 확인하지 않았다. 불시에 한 번씩 검사하고 그때 표가 없으면 벌금이 70유로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검사한 적이 없었다. 한국은 복지를 늘이면 국민이 나태해진다느니 그런 말을 하는데 여기는 양심에 맡기고 있다. 시민과 국민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이야기다. 이 태도는 정부가 정책을 시행할 때, 국민 국가의 사회적 약속과 협의를 구성할 때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성을 만들 수밖에 없다. 나는 역시 우물 안 개구리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