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로 글을 쓰고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확실히 생소한 경험이다. 낯선 경험이기도 하다. 내가 쓰는 글에서 내가 타자가 되고 주변인이 되는 경험이기도 하다. 이런 어려움의 일부는 독자를 상정하기 어려운 문제에서 발생한다. 누가 읽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독해될 것인가?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다. 한국어로 트랜스젠더 이슈를 쓴다면 읽을 사람을 대충은 가늠할 수 있다. 아무리 쉽게 써도 결국 읽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영어로 번역해서 글을 낸다는 건 다른 문제더라. 아무 것도 가늠할 수가 없다. 트랜스페미니즘 이슈에 관심있는 미쿡인이 읽을까? 글쎄… 다른 훌륭한 글도 많은데 굳이 내 글을 읽느라 시간을 허비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3000 단어 정도의 짧은 글이라 휘리릭 읽고는 잊어버리겠지만. 사실 누가 읽고 어떻게 독해될 것인가라는 고민은 어떤 인상을 남길 것을 가정한다. 하지만 허접해서 그냥 잊히는 글이 되겠지. 후후후.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어디서 어디까지를 설명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과 글자수의 제한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최대한 설명하되 최대한 줄여야 한다. 필연적으로 현장보고서의 성격을 지니지만 또한 이론적 작업이어야 한다. 한국어로만 작업한다면 이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영어로 작성하면서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기분이었다. 번역을 의뢰해서 받았는데 많이 낯설었다. 문장의 뉘앙스, 의미, 단어의 복잡한 의미 등을 가늠하기엔 내가 너무 모른다. 그래서 이것이 내가 쓴 글인지, 낯선 글을 편집하는 것인지 계속 헷갈렸다. 내가 한글 판본을 쓰고, 누군지 모르는 타인이 영어로 번역해주고, E가 전체적으로 감수를 해주고, 다시 내가 수정을 하는 작업을 했다. 이 글의 저자는 누굴까? 그렇다면 어디까지 줄이고 어디까지 자세히 설명할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몸이 복잡했다.
내가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는 것과는 별개로, 이 글이 출판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너무 허접해서. 뭐, 허접해서 출판할 수 없다는 답장을 듣는다면 더 잘 보강해서 한국어로 출판하면 될 일이다. 내게 중요한 건 한국어가 영어로 번역되는 경험을 했다는 것, 그리고 번역된 영어를 안 되는 영어 실력으로, E를 괴롭혀가며 수정하려고 애쓰는 경험을 했다는 것. 출판되건 안 되건 상관없이 나로선 소중한 경험이다. 한 번만 더 하고 나면 당분간 영어로 글을 쓰는 일은 없겠지만(정확하게는 내가 한국어로 쓰고 타인의 도움을 받아 영어로 번역하는 일) 한국어로 글을 쓰는 작업이 새로울 것 같다. 도움이 될 듯도 하고. 게재되지 않아도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한국어로 2800 단어를 썼다(참고문헌 포함). 영어로 번역하자 3900 단어가 되었다. 히익… 뭐라고? 3000 단어로 제한하고 있고, 그래서 2800 단어를 썼는데 3900 단어라고? 줄이느라 고생했다. 아니, 논의를 과도하게 압축하고 800단어에 해당하는 내용을 버렸다. 아쉽지만 한편으론 잘 되었지.
+암튼 이 모든 과정에서 무척 바쁜 E가 가장 고생했다. 고맙고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