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페미니즘, 트랜스젠더페미니즘 글쓰기

트랜스페미니즘 관련 글을 쓰기로 했다. 트랜스젠더 페미니즘을 이슈로 글을 쓰는 것 자체는 특별할 것 없는 일이다. 하지만 글을 구성하기가 어렵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어떤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과문한 탓이며, 내가 알고 있는 한계 내에서 말할 수밖에 없지만, 여전히 한국에서 한국어로 트랜스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학술적 글, 이론적 글은 (나와 지혜 선생님의 글, 시우가 쓴 글 정도를 제외하면) 없는 듯하다. 블로그라면 완전변태 블로그에 안팎 님이 트랜스페미니즘으로 사유하는 글을 가끔 남기고 있다. 그러고 나면, 나는 아직 못 찾았고 그래서 내가 놓치고 있는 걸 누군가가 알려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도 있다. 페미니즘에서 트랜스젠더를 언급하거나, 트랜스젠더가 페미니즘을 언급하는 수준 말고, 트랜스페미니즘으로 다시 사유하고자 하는 글 말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론적 성취를 어느 정도 갖춘 글을 말하는 것이긴 하다.

젠더퀴어 담론을 구성하는 일군의 인물들이 트랜스페미니즘, 혹은 젠더퀴어페미니즘을 모색할 가능성이 있지만, 이론적 급진성으로 사유의 전회를 성취했는지엔 아직 판단 유보 상태다. 당연히 이것은 보잘것 없는 나의 판단일 뿐이니 얼마든지 틀렸을 것이다. 역시나 나의 게으름으로 못 찾은 좋은 글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좋겠다.

어찌보면 이런저런 상황을 아쉬워하기엔 전혀 다른 문제가 있다. (비트랜스)페미니즘에서 트랜스젠더와 관련하여 논쟁적 논의를 별로 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많은 논문은 법학 논문이거나,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삼는 논문이다. 트랜스젠더리즘으로 사회적 구조를 재구성하려는 글은 별로 없다. 동시에 한국의 이 망할 ‘보편적 인권 개념’, 권력이라곤 완전히 무시하는 ‘인권’ 개념, ‘당사자주의’ 등은 논쟁과 복잡한 논의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나는 정말이지 때때로 ‘천부인권’이란 개념, 운동이나 학제에서 이른바 ‘소수자’ 이슈를 인권으로만 풀어가는 방식이 매우 문제가 많다고 고민한다. 인권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PC(정치적 올바름)의 새로운 판본인 인권 감수성 있는 사람이란 강박이 어떤 말도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중요한 많은 논쟁거리가 공적 논의 자리가 아닌 뒷풀이자리나 사석에서, SNS에서 이뤄지고 있다. 어쩌자는 것인지…

언젠가 내가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단독 저서를 낸다면 그것은 트랜스페미니즘을 논하는 글이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별다른 논쟁도, 논의도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고 애쓴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가 있다. 소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논의가 가능한가란 질문이다. 침묵하거나 대체로 사석에서 짧게 논평하는 수준을 제외하면 논의의 장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를 생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러니까 내가 작업하고 있는 것은 그저 혼자만의 부질없는 외침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쓰지 않겠다고? 아니,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 할 것이고 그냥 혼자 떠들거다. 피드백은 내가 염두에 둔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글을 쓰고 싶으면 쓸 뿐이다. 피드백 없다고 외롭다면 트랜스젠더 이론이나 퀴어 이론 자체를 그냥 접어야 한다. 그럼에도 고민은 된다. 사실상 논의의 장 자체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논의를 전개한다는 것이, 어떤 이론적 지형, 구체적 토양, 그리고 접점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기 때문이다. 분명 구체적 삶에서 고민하고 구체적 현장에서 나온 논의인데, 이론 놀이하는 느낌이다.

죽음에 관한 정신없는 글

어떤 사람은 자신의 파트너가 죽자 매주 무덤을 찾아 몇 가지 음식을 놓고 파트너가 살아 생전 좋아한 노래를 색소폰으로 부른다고 했다. 뭔가 뭉클한 이야기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다음 꾸준히 애도하는 행위는 사랑을 되새기는 작업인 동시에 고인을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작업이면서 조금씩 지워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애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은 결코 방부 처리될 수도, 동결 건조될 수도 없으며, 아마 이 사실은 애도하는 사람이 가장 확실하게 깨닫겠지. 그럼에도 꾸준히 애도하는 마음, 마음의 변화를 꾸준히 느끼는 시간은 소중하고 또 귀한 시간이다. 애도하는 시간은 충분할 수록 좋고, 3년이란 시간은 어쩌면 꼭 필요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죽은 다음에도 젠더는 서로 다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동성 간의 파트너가 죽어서 같은 묫자리에 나란히 묻힌다면 어떻게 자리를 배치할 것인지도 질문거리로 만들면 흥미로울 듯하다. 한국에서 사람이 죽은 뒤 납골당의 어느 한 칸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파트너와 한 자리에 묻히고자 한다면 묫자리의 위치를 고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이른바 ‘가족’납골당이어도 위치를 골라야 할 것이다).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즉 애도를 하는 사람이 보는 입장에서 남성은 왼쪽, 여성은 오른쪽에 묻힌다. 고인이 애도하는 사람을 보는 기준으로 하면 남성은 오른쪽, 여성은 왼쪽에 묻힌다. 이것이 한국의 장례문화며 일종의 문법이다. 두 가지 질문. 동성파트너는 각각의 위치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본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 위치가 젠더를 독해하는 근거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해석이 남아 있는 한에선 어떤 식으로건 이것을 교란할 방법을 사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 왜 우리의 삶은 죽어서도 젠더가 규정되고 다시 한 번 지정되는 방식이어야 하는가? 최소한 한국 문화에서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죽은 다음에도 끊임없이 이원젠더의 틀에 규정된다. 이럴 때 묫자리 배치를 통해 젠더가 규정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가능한 방법은 납골당 안치(하지만 납골당에 안치해도 젠더가 표시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거나 법적으로 가족을 구성하지 않는 것 정도겠지. 전혀 다른 장례 문화, 전혀 다른 납골 문화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불가능한 방법이지만 나는 풍장을 하고 싶다. 연애 강박, 커플 강박인 사회, 그런데 오직 둘 만의 연애만을 자연스러워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에 문제제기 하는 방식은 유골함을 랜덤으로 배치하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납골당에선 유골함이 랜덤으로(엄밀하게는 유골함이 안치되는 순서대로) 배치된다. 죽음, 장례문화에서 계급 이슈를 빼고 사유할 수도 없는데 유골함에도 계급이 존재한다. 사유할 거리는 무척 많다.

부산 가는 길

정말 정신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 어째서인지 정신이 없어서 집중을 할 수 없고 할 일이 계속 밀리고 있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주변에 폐만 끼치고 있다. 이것은 알리바이일까? 이것은 어떤 혐의를 만들고자 하는 작업일까? 내가 참 나쁘다는 말도 다 헛된 시간이고 언제는 착한 적 있느냐는 말고 결국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냥 나는 약속을 어기고 있다.
E의 도움을 받고서야 간신히 부산에 갈 준비를 했다. 비오는 날 E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비를 맞거나 다른 고생을 하며 간신히 부산에 갈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친밀한 사람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상황을 만들고서야 간신히 수습하는 지금 나의 상황이 갑갑하다. 도움을 받는 삶이 갑갑한 게 아니라 계속 정신이 없는데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점이 나의 가장 큰 문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피곤하다. 눈이 아프다. 2시에 자고 4시부터 잠에서 계속해서 깨어났다. 그냥 내가 엉망이다. 비오는 날 부산 가는 길은, 어째서인지 도피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