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는 별 상관이 없는데 이걸 글로 쓰거나 말로 할 때, 특히 한국이 아닌 곳에 말할 때 정말 묘하게 서글퍼지는 그런 일이 있다.
이를테면 현재 한국에선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어떤 법적, 의료적 제도나 규정된 절차가 없다. 나는 이것이 장점이기도 하다고, 혹은 무작정 이것이 나쁘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제도의 부재는 언제나 나의 법적, 의료적 요구가 성취될 가능성을 복불복으로 만들고 이것은 내 삶의 불안정을 가중한다. 하지만 복불복은 틈새를 만든다. 예를 들어 법으로 만 19세 이상부터 호적 상 성별을 변경할 수 있다는 지침이 있다고 해도, 규정된 제도가 없기에 만 19세가 안 된 이들도 경우에 따라 호적 상 성별을 변경할 수 있다. 이 틈새의 힘을 무작정 무시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제도의 부재를 마냥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도를 만드는 것이 곧 인권의 진전으로 평가되는 어떤 경향성에서, 제도의 부재는 삶 자체를 초라하고 불쌍한 것으로 만든다. 제도를 만드는 것이 결코 삶의 질의 진전을 의미하지 않음에도 ‘제도가 부재한다’라는 말이 갖는 부정적 효과를 지우기란 쉽지 않다.
제도의 존재 혹은 부재와 삶의 질, 인권의 현실은 분리해서 사유해야 하는 이슈임에도 이것을 연결해서 사유하고 설명하는 경향성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 특히 한국 맥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선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어떤 나라는 제도는 잘 갖춰져 있지만 혐오 폭력이 빈번하고 제도가 실제 개인의 삶에 작용하지 않는다. 한국은 제도가 부재하지만 미국이나 브라질에서처럼 직접적 살인의 형태로 혐오 폭력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의 혐오는 그 형태가 다르기 때문인데, 간접적 살인이나 오지랖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이른바 트랜스포비아는 “트랜스젠더 이 더러운 괴물”과 같은 직접적 표현도 있지만, “내가 널 위해 충고하는데 말야”, “그래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말이야”와 같이 친절, 염려, 좋은 사람이라는 사회적 이미지를 채용해서 발화한다. 이런 방식으로 트랜스젠더의 피를 말리고 때때로 죽음이나 다른 여러 선택을 하도록 한다. 그래서 서구 논의 맥락으로, 서구의 혐오 폭력이나 혐오 발화 논의로는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기가 매우 곤혹스럽다. 동시에 제도의 존재나 부재, 삶의 질, ‘인권의 진전’을 연결해서 설명하는 방식은 한국에서의 삶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게 한다(비단 한국에서만이겠느냐만).
아무려나 글을 쓰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하다. 주요 독자가 한국인 혹은 한국어만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란 점에서 몸이 더 복잡하다.
뀨물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