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가는 길

정말 정신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 어째서인지 정신이 없어서 집중을 할 수 없고 할 일이 계속 밀리고 있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주변에 폐만 끼치고 있다. 이것은 알리바이일까? 이것은 어떤 혐의를 만들고자 하는 작업일까? 내가 참 나쁘다는 말도 다 헛된 시간이고 언제는 착한 적 있느냐는 말고 결국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냥 나는 약속을 어기고 있다.
E의 도움을 받고서야 간신히 부산에 갈 준비를 했다. 비오는 날 E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비를 맞거나 다른 고생을 하며 간신히 부산에 갈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친밀한 사람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상황을 만들고서야 간신히 수습하는 지금 나의 상황이 갑갑하다. 도움을 받는 삶이 갑갑한 게 아니라 계속 정신이 없는데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점이 나의 가장 큰 문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피곤하다. 눈이 아프다. 2시에 자고 4시부터 잠에서 계속해서 깨어났다. 그냥 내가 엉망이다. 비오는 날 부산 가는 길은, 어째서인지 도피같다.

트랜스젠더 페미니즘

뭔가 이상하다는 감이 있어서 쓰는 글.
예전에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글을 쓰곤 했다. 지금도 필요하다면 쓰곤 한다. 하지만 이것이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리즘을 적대하는 방식으로, 서로 대립하는 논의로 독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 자신 트랜스페미니스트란 점에서, 그리고 내가 알고 있고 또 친한 많은 트랜스/퀴어 페미니스트를 떠올린다면 트랜스젠더와 페미니즘을 적대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척 곤란한 일이다. 이원 젠더로 사유하는 젠더 인식론을 강하게 비판한다고 해서 이것이 페미니즘을 적대하거나 비난해야 할 대상으로 해석할 근거는 없다. 인식론적 전회를 요청하는 것이며, 트랜스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방법일 뿐 나는 단 한 번도 페미니즘이 잘못되었다거나 그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나의 인식론적 밑절미는 페미니즘이다. 내가 처음으로 숨통이 트인다고 느꼈던 순간도, 내가 정말 즐거웠던 순간도, 내가 트랜스젠더 이론을 공부할 수 있었던 계기도 모두 페미니즘을 접하면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페미니즘과 강한 교차성을 형성하며 혹은 페미니즘의 자장 안에서 작업을 하고 있고 할 것이다. 나아가 퀴어이론이나 트랜스젠더리즘이 페미니즘과 완전 분리된, 별개의 학문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퀴어이론이나 트랜스젠더리즘을 별개로 사유해선 안 된다고 믿는 이유와 동일하다. 물론 어떤 페미니스트는 트랜스젠더를 적대하고 또 혐오했다. 그래서? 이것이 페미니즘 자체를 비난하거나 페미니즘 자체를 적대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냥 개별 페미니스트, 혹은 어떤 경향성을 비판할 뿐이다.

어떤 미안함

어제 올들어 첫 강의를 했다. 석사를 졸업한 여성학과에서 초대해준 강의여서 방법론 혹은 인식론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강의를 준비했는데 처음 시도한 내용이다보니 말이 좀 많이 꼬였다. 간단하게 내용은 “여성이란 무엇인가” 혹은 “누가 여성인가”란 질문의 세 가지 다른 변주, “여성과 남성은 어떻게 다른가”, “여성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는가”, “젠더란 무엇인가”가 각각 어떤 의미며 어떤 한계와 가능성이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 내용은 어떻게 보면 섹스-젠더의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긴 하지만 이야기하는 방식, 구성이 달라서 나름 재밌고 어려웠지만 결과적으로 강의 자체는 실패! ;ㅅ;
강의가 끝나고 뒤이어 ㅂㅁㄹ 님의 성교육 강사되기와 관련한 강의를 들었다. 요즘 성교육 자료를 긁어모으고 있어서 그런지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게 들었다. 그러며 확인 겸 깨달은 점은, 성교육 교재(특히 정부 기관이나 정부 기관과 관련 있는 기관에서 발행한 것)는 매우 자주 지배 규범이나 정치 권력이 지향하는 성담론을 담고 있으며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은 교재의 내용과는 다른 성관념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교육 교재의 지향과 개개인의 지향이 완전히 충돌하느냐면 그렇지도 않다는 점. 따라서 성교육 교재를 독해하는 작업은 접점과 간극을 잘 살피는 것인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강의가 모두 끝나고 오랜 만에 뒷풀이에 잠깐 함께 했다. 뒷풀이 자리를 별로 안 좋아해서 가급적 다 빠지는 편인데, 시간이 많이 늦었음에도 잠깐 함께 했다. 뭔지 모를 미안함이 있었다. 강의를 망해서가 아니라 내가 학교를 다닐 때 너무 내 공부만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어떤 미안함이 있었다. 이런 저런 상황을 꼼꼼하게 살피면 내가 미안할 문제는 아닌데, 이상하게 그냥 미안했다.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