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아카이브의 역할

오늘 비온뒤무지개재단 총회 때,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의 활동 보고 때 아카이브의 역할을 우선 소개하며 한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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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설립 초기에 아카이브가 중요하다고 해서 부설기관으로 만드는데 동의하셨지만, 사실 아카이브가 어떤 건지 정확하게 잘 모르시죠? 아카이브나 기록물관리소란 말 자체가 다소 생소하기도 하고 정확하게 뭐하는 곳인지 감이 안 잡히기 쉽습니다. 아마도 들어보신 아카이브라면 국가기록원과 한국영상자료원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둘 다 국가에서 운영하고, 국가기록원은 정부의 행정, 사법 문서를 보관하고 있고요.
역사적으로 아카이브는 문서가 등장한 그때부터 함께 했다고 합니다. 왕정 시대에 아카이브는 왕, 혹은 통치 구역의 최고 권력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카이브 혹은 기록물은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역할을 했거든요. 이것이 근대 국민국가로 넘어가면 정부기관의 행정, 사법 문서를 정리하고 보관하는 성격으로 바뀝니다. 그리하여 정부의 권위, 정부 정책의 역사성을 구축합니다. 정부의 통치 기록을 보관한다는 점에서, 아카이브는 통치 기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대 아카이브 연구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를 보면, 아카이브는 정부의 문서만을 관리하는 역할에 제한된다는 입장과 퀴어락과 같은 주제 아카이브는 아카이브가 아니라는 입장이 여전히 강한 듯합니다.
대충 짐작하시려나요? 누군가가 기록해주겠거니, 국가기록원에 있겠거니 할 때 퀴어의 아카이브는 그냥 버려지거나 기억과 소문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다더라. 구체성이 사라진 소문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를 들어 한국의 LGBT/퀴어의 운동 혹은 ‘가시성’은 대체로 1990년대 초반에서 시작합니다. 1993년 12월 초동회가 설립되었고, 그 보다 2년 전인 1991년 11월에 주한외국인 레즈비언 모임 ‘사포’가 생깁니다. 사포는 영자신문에 광고를 해서 사람을 모았다고 하는데요. 그럼 사포의 광고를 직접 본 사람이 있나요? 거의 대부분이 사포의 광고를 본 적 없고 처음 모임에서 어떤 회의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저 <버디> 같은 잡지에서 성적소수자 운동 10년을 정리한 글을 통해 짐작만 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1993년 설립된 초동회의 경우, 소식지는 한 권 남아 있지만 첫 모임에서 어떤 논의를 했는지, 구체적 회의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을 논의했고 기획했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과거로 가서, 1990년의 퀴어 관련 기록은? 1989년의 퀴어 관련 기록은? 공식적으로 책임지고 수집을 한 사람이 (현재로선)없기 때문에 한국의 퀴어 관련 기록은, 구술과 기억만이 아니라 구체적 기록물로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은 계속해서 1990년대 초반이어야 하는 것일까요?
다른 한편, 퀴어락은 1990년대 후반 설립한 한국동성애자단체협의회의 회의록을, 한채윤 님이 기증해줘서, 모두 등록하고 컬렉션으로 만들었습니다. 만약 이 회의록이 없었다면 한동협의 역사는 그저 그런 협의체가 존재했다는 수준에서 끝날 것입니다. 마치 소문처럼요. 하지만 회의록을 통해, 단체 설립 이전부터 활동 시기의 여러 기록을 통해 한동협은 구체성을 지닙니다. 어떤 운동을 바랐고 기획했는지 알 수 있지요. 그리고 이 기록을 통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역사성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록물이 보존되지 않는다면 그냥 잊힐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건, 예를 들어 작년 퀴어문화축제에서 4시간의 퍼레이드를 진행했다는 일 역시, 별다른 기록이 남지 않는다면,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끝나겠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 있었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고 대응했으며, 어떤 장면이 있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매우 중요한 사건이 풍문이 되는 거지요. 그렇기에 구체적 기록물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일은 퀴어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퀴어 아카이브의 기록물은 퀴어 존재에 구체성과 역사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하여 누구도 퀴어의 역사성을 부정할 수 없도록 합니다. 이것이 아카이브의 역할이고 퀴어 아카이브의 역할입니다.

박사논문 관련 욕심

문득 떠오른 박사학위 논문 관련 욕심.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고 공개하고 나면, 1980년대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을 모에화해서 BL물이나 백합물이 잔뜩 나올 수 있는 그런 논문을 쓰고 싶다. 우후후. 특별히 근거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대책 없는 망상 중 하나로 하는 얘기다. 크. 하지만 이렇게 쓴다면 정말 재밌을 텐데…

퀴어이론 입문을 위해 (ver.20150204)

오전에 퀴어락에 올린 것입니다. 퀴어 이론과 관련하여 예전부터 완전 기초 설명서와 학술서 사이에서 적절한 책이 없다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최적의 대안이 없고요.
다른 한편, 종종 퀴어이론을 공부하고 싶은데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이왕이면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된 것 중에서요. 퀴어이론 입문서가 번역되어 있지만 여전히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러 의미겠지요. 이미 번역된 어떤 책은 읽었다는데 의의를 둘 뿐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거나, 책은 여럿 있는 거 같은데 어떤 책으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거나…
제가 남들보다 더 많이 알아서 이런 무모한 일을 한 건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그냥 제가 아는 걸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퀴어락에서 작성한 입문 목록이 별로라면 다른 누군가는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고 공유하면 되겠지요. 더 많은 목록이 생긴다면 정말 기쁜 일이에요. 아무려나, 웹서핑으로만 지식을 습득하지 않고 체계를 갖추고 맥락화하며 퀴어 이론, 퀴어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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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이론 입문을 위해 (ver.20150204)
한국에서 LGBT나 퀴어와 관련한 책은 간헐적이지만 어쨌거나 출판은 됩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동성애란 무엇인가?’와 같은 수준의 완전 입문서가 아니면서, 그렇다고 학술적 배경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학술서가 아닌 책을 찾으려고 하면, 찾기가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아예 없지는 않지만 찾기가 어렵고 어쩐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때론 어떤 것을 먼저 읽으면 좋을지 고민도 되고요.
그래서 퀴어락이 현재 소장하고 있는 단행본 및 학위논문 중에서 퀴어이론 입문으로 읽으면 좋을 책을 골라봤습니다. 어디까지나 제안이며 입문을 위한 기준은 아닙니다(당연하지요!).
선택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퀴어락이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에서 골랐습니다. 그래서 목록에 있을 법한 책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목록은 종종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처럼 유명하고 중요하지만 입문으로 읽기엔 무리가 있는 책은 제외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되었거나 한국어로 쓴 책만 선택하였습니다.
-학위논문의 경우, 생애사나 특정 문화 공간에 집중하는 논문은 상당히 많고 훌륭한 논문도 많습니다. 하지만 여기선 이론적 논의에 충실한 논문만 골랐습니다.
ㄱ. 인식론: 지식 습득에 앞서 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인식론을 공부하고 싶다면
-서지류 단행본 502 – 샌드라 하딩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여성들의 삶에서 생각하기』
-서지류 단행본 338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 지식, 의식, 그리고 힘기르기의 정치』
ㄴ. 차근차근 읽기-단행본
-서지류 단행본 617 – 애너매리 야고스 『퀴어이론: 입문』
-서지류 단행본 468 – 권김현영 외 『남성성과 젠더』
-서지류 단행본 743 – J. 잭 핼버스탬 『가가 페미니즘: 섹스, 젠더, 그리고 정상성의 종말』
-서지류 단행본 046 – 퀴어이론문화연구모임 위그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
-서지류 단행본 552 – 한채윤 외 『성의 정치 성의 권리』
-서지류 단행본 105 – 토마스 라커 『섹스의 역사』
-서지류 단행본 009 – 조병희 『섹슈얼리티와 위험 연구』
-서지류 단행본 554 –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
ㄷ. 학위논문
-서지류 논문 028 – 김지혜 《레즈비언/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본 서구 레즈비언 이론의 발전과정과 역사적 의의에 대한 연구》
-서지류 논문 063 – 서동진 《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동성애 정체성의 사회적 구성에 관한 연구》
-서지류 논문 012 – 조성배 《게이 남성의 소비 공간과 몸의 정치학》
-서지류 논문 004 – 나영정 《성전환남성(FTM)의 주체화와 남성되기에 관한 연구》
-서지류 논문 001 – 배성민 《젠더 범주의 다중성 연구》
-서지류 논문 107 – 류혜진 《젠더퀴어로서의 레즈비언 부치와 젠더 상황에 대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