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걸 찾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아카이브, 특히 퀴어 아카이브는 LGBT/퀴어 운동과 함께 시작하기보더 운동을 시작하고 몇 년 뒤부터 시작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데 아카이브를 시작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어떤 자료가 축적되어야 하고, 수집할만한 기록물이 쌓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의 다른 말은 퀴어 아카이브는 운동의 역사 이후에 등장한다.
퀴어 아카이브의 핵심히 흔히 구하기 힘든 퀴어 관련 기록물을 열람하는 것이라면 바로 이 측면에서 퀴어락의 역할은 다소 복잡하다. 한국에서 LGBT/퀴어 인권운동을 시작한 시기를 1990년대로 잡을 때 퀴어락의 등장은 당연히 1990년대 이후로 잡을 수밖에 없다. 현재 퀴어락은 1998년 섹슈얼리티 잡지 <버디>를 출간했던 시기에 아카이브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 말은 퀴어락이 수집하기 시작한 기록물의 상당수는 1990년대부터 그 이후의 기록물에 집중해 있다는 뜻이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확하게 이 지점에서 묘한, 그리고 복잡한 딜레마가 발생한다. 지금 시점에서 1990년대 이후 퀴어 운동의 역사를 쓰는 작업을 한다면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특별히 새로운 내용이 나올 가능성이 적다. 한채윤 님과 친구사이가 각각 레즈비언과 게이의 운동사 혹은 근대 이후 역사를 어느 정도 정리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정리’라는 측면에선 분명 새로운 내용이 나올 가능성이 적다. 동시에 1990년대 이전 시기의 역사는 전혀 정리가 안 되어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연구를 하는 입장에서(이것은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매력적인 시기이자 정말 작업이 필요한 시기는 1990년대 이후가 아니라 1990년대 이전 시기다. 그리고 1990년대 이전 자료는 내가 개인적으로 수집한 기록물이 얼마간 있다고 해도 아직 퀴어락에 등록된 기록물은 몇 개 안 된다. 연구를 하기엔 무척 어려운 상황이고 어떤 의미에선 거의 불가능한 작업 같기도 하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지만. 트랜스젠더를 중심으로 1960-80년대를 다룬 나의 글이 있지만 지금이라면 아예 다시 써야 하는 상황이라 부끄럽고 한없이 부족할 따름이다.
[오늘 방문한 분이 1980년대 자료가 있냐고 물었을 때 없다고 답했는데 뒤늦게 깨닫길 최소한 하나 이상 있다. 혹시 방문하신 분 제 블로그에 오신다면,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신다면 나중에 다시 물어봐주세요. ㅠㅠㅠ ]
다른 한편 나는 현재 한국 LGBT/퀴어 운동의 역사를 쓰는 작업에 있어 1990년대 이후 역사도 제대로 연구가 안 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이것은 퀴어락 등록 작업을 하면서 깨닫는 작업이기도 한데, 사실 최근 퀴어 운동이나 퀴어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이들이 1990년대 이후의 역사를 꼼꼼하게 알 수 있는 문서는 없다. 개괄적으로 다룬 두 편의 논문이 있지만 그것은 개괄적 흐름을 짚고 있지 여러 사건을 누락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임태훈을 둘러싼 이슈 같은 것을 분석하지는 않았다. 게이나 레즈비언 중심으로 역사를 분석한다고 해도 한채윤 님이나 친구사이의 글이 있다고 해서 충분하지는 않다. 더 많은 분석 작업이 필요하다. 차별금지법을 중심으로 운동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도 있고 여러 가능한 분석 지점이 존재한다. 한국동성애자단체연합에서 국가인권위원회, 학생인권조례, 서울시민인권헌장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법률 중심이 아니라 인권 개념을 재구성하는 차면에서 다시 분석할 수도 있다. 더구나 바이를 중심으로 1990년대 이후의 운동을 완전히 새롭게 분석하거나, 트랜스젠더 맥락에서 다르게 분석하는 작업은 아직 없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까 1990년대 이후로도 할 일은 여전히 많다. 물론 나는 대략 1920년대부터의 역사를 분석하겠지만.. 😛
(결국 나는 설득력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암튼 1990년대 이전 기록물이 거의 없어서, 누군가가 질문할 때 “없어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때 정말 안타깝고 속상한 일이다. 일단 논문 작업이 끝나면 좀 괜찮을까? 1990년대 이전 기록물이 이렇게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1990년대 이전의 역사를 쓰려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란 점에서 기대가 상당하기도 하다. 역사를 연구하는 한국의 LGBT/퀴어 연구자가 늘면 퀴어 아카이브가 풍부해질 뿐만 아니라 퀴어의 역사 자체가 어떻게 변할까? 기대가 상당히 큰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