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오종,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트랜스젠더, 욕망, 혐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를 봤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엄청 좋습니다, 꼭 보세요. 조금 더 길게 요약하면, 트랜스젠더, 크로스드레서, 레즈비언, 바이/양성애, 욕망과 몸의 형상, 혐오의 복잡하고 또 미묘한 순간 등을 정말 절묘하게 잘 그린 영화입니다, 꼭 보세요, 최고예요.
이제부터 스포일러가 난무합니다. 보실 분은 절대 읽지 마세요. 경고했으니까 범인은 질레입니다! 크크크.
(한 번 쓰고 다시 수정을 안 해서 비문이나 오탈자가 상당할 듯합니다. ㅠㅠㅠ)
///스포일러 주의///
세세하게 분석하고 싶은 장면이 정말 많지만 몇 가지만 이야기하면…
마지막 장면도 좋았다. 클레어가 버지니아/데이빗과 함께 하교하는 아이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클레어가 임신한 모습이 나온다. 이 모습을 보여주며, 아무런 설명 없이 영화를 마무리짓는데 나는 이 마무리가 정말 좋았다. 영화가 끝났을 때 다른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엔 상당히 당황하는 이들이 많았고 어떤 이들은 ‘프랑수아 오종 영화니까’로 수습했다. 맞다. 이것이 내가 아는 프랑수아 오종 영화다. 구질구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이런 모습으로 끝난다. 클레어가 누구와 성관계를 하고 임신한 것일까? 만약 7년 전의 남편 질레라면 이 경우, 버지니아/데이빗-클레어-질레라는 삼각 관계, 혹은 배타적 이성애 관계가 아닌 다른 어떤 관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만약 클레어가 질레와 헤어졌거나 이혼하고 버지니아/데이빗과 살고 있으며 버지니아와 성관계를 하고 임신을 한 경우라면 트라베스티/트랜스베스타잇/크로스드레서/트랜스여성인 버지니아가 음경을 적극 사용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음경을 직접 사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것은 또 이것대로 흥미로운 순간이다. 보통 트랜스여성으로 독해할 수 있는 인물의 음경/트랜스클리토리스는 거의 언급을 안 하는 경향이 있는데, 혹은 금기처럼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경향을 거부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누구와 성관계를 맺었고 그래서 클레어가 임신한 상황에서 정자 제공자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무어 그리 중요한가란 측면이다. 질문하면 질문하는대로 흥미롭지만 동시에 정자 제공자를 궁금해하는 그 순간 자체도 흥미롭다. 이걸 알아서 뭐할까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자기 반성).
클레어나 버지니아/데이빗에 비해 질레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어 아쉽지만 질레도 흥미로운 인물이다. 클레어가 버지니아/데이빗을 트라베스티가 아니라 게이라고 질레에게 말한다. 그래서 질레는 버지니아/데이빗을 여성스러운 게이로 인식한다. 그런데 클레어가 버지니아와 질레가 성관계를 맺는 상상을 하는 장면에서, 버지니아가 아니라 질레가 바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상상한다. 이 장면은 무척 흥미로운데 질레가 규범적이거나 완고한 이성애-비트랜스남성이 아닐 가능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장면이기 대문이다. 적절한 증거는 아니지만, 질레는 클레어보다 아이를 더 잘 돌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울러 질레가 데이빗/버지니아를 집에 데려다 준 다음 귀가할 때 거리에서 성판매를 하는 드랙퀸을 구경한다. 그런데 그 모습이 여러 가능성을 암시하는데, 드랙퀸을 향한 질레의 욕망이거나, 드랙퀸이고 싶어하는 질레의 욕망이거나, 데이빗/버지니아가 드랙을 하는 모습을 궁금해하는 욕망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여러 가능성이 담겨 있다. 규범적 이성애처럼 연기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이 영화의 매력은 관용이나 관대함을 빙자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혐오, 트랜스젠더의 몸을 향한 혐오를 개몽적인 방식이 아니라 욕망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질레가 클레어의 설명을 통해 데이빗/버지니아가 게이남성이라고 알게 되었을 때, 그 정보 자체는 쿨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같이 식사도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 알았냐는 둥 가장 흔하고 편견에 가득한 질문이나 대화만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쿨한 태도, 관용 따위가 결코 퀴어의 삶에 긍정적 태도가 아님을 정확하게 짚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것 이전에, 클레어가 질레에게 버지니아/데이빗을 트라베스티가 아니라 게이라고 설명하는 이유는 “성도착[복장도착이랬나]보다는 게이가 낫”기 때문이다. 버지니아/데이빗을 위한다고, 가장 잘 이해한다지만 그 순간에도 혐오나 두려움은 존재한다.
압권이기도 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영화 후반부에 나온다. 버지니아/데이빗과 클레어가 버지니아 호텔에서 성관계를 맺으려고 하는데, 서로 옷을 거의 다 벗은 순간에 클레어는 버지니아의 발기한 음경 혹은 트랜스클리토리스를 보고는 “넌 남자야”라고 말하며 방을 나가버린다. 정말 아픈 순간이었고 눈물이 났던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난 이 장면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비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를 ‘이해’하거나 ‘좋아’할 수는 있지만 트랜스젠더의 복잡한 몸을 인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란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음경이 없는 게이/바이 ftm/트랜스남성, 발기하는 음경/트랜스클리토리스가 있는 레즈비언/바이 mtf/트랜스여성의 모습을, 글로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어도 실제 조우하거나, 혹은 섹스 상대로 상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다양한 편견, 사회 구조, 규범, 혐오, 분노, 우울 등 온갖 것이 튀어나온다. 나로선 이 영화에서 가장 아프면서 좋았던 순간이다.
그리고 또 재밌는 장면이 많은데 버지니아가 교통 사고가 났는데 버지니아의 장인 장모가 다친 것과 아동 양육을 가장 먼저 걱정하지 복장전환은 나중에야 언급한다. 한국이건 미국이건 다른 어느 나라건, 젠더 표현과 실천을 최우선 삼으며 젠더 표현과 젠더 범주를 이유로 결코 끊을 수 없다는 혈연도 끊는다는 점을 배경으로 삼을 때 재밌는 장면이다.
버지니아/데이빗의 이름도 재밌는데, 데이빗은 다윗을 의미하는데 여성 이름은 버지니아다. 참고로 1950-70년대 미국에서 백인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트랜스젠더/트랜스베스타잇/크로스드레서 운동을 했던 선구적 인물의 이름은 버지니아 찰스 프린스다. 버지니아가 특별한 이름은 아니지만 흘려들을 이름은 아니다. 동시에 이 영화가 히치콕의 영화를 많이 환기시키는데 버지니아란 이름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살인자 mtf/트랜스여성 혹은 살인자 트라베스티/트랜스베스타잇/크로스드레서와 더 많은 관련성을 갖는 지점이기도 하다.
클레어의 욕망이 버지니아를 조종하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데 이것도 퀴어한 순간이다. 왜 다른 여자인 친구가 아니라 로라의 남편이며 남성으로 통했던 사람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가란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클레어는 처음부터 로라(죽은 친구이자 버지니아/데이빗의 아내)를 사랑했다고 말하고 실제 로라를 유혹한다. 로라가 다른 남자를 만나면 표정이 제대로 썩는다. 클레어의 욕망이야말로 할 얘기가 많다.
번역 자막에서 트라베스티를 성도착이었나 복장도착으로 번역하고 있다. 번역에 있어 정말 화가난 순간이다. 복장전환인으로 번역하면 될 것을 도대체 왜. 그런데 클레어를 영화의 중심으로 두고 번역한다면 복장도착이나 성도착으로 번역하는 게 아주 틀린 것도 아니라는 게 어려운 지점이다.
+
이 글에선 E와의 대화가 상당 부분 섞여 있습니다.

팟캐스트 녹음

처음은 아닌데 처음 같은 느낌으로 오늘 팟캐스트에 참가를 해서 녹음을 했다. 레주파에 한 번 참가한 적 있지만 그건 어쩐지 정규방송에 참가한 느낌이라 팟캐스트는 이번이 처음인 거 같달까. 처음이란 느낌이 강해서인지 긴장도 했지만 어나더미 님과 진오 님 덕분에 편하고 즐겁게 참가를 했고 떠들 수 있었다. 두 분을 뵈어서 즐거웠고, 나중에 진오 님과 따로 나눈 얘기도 즐거웠다.

아무려나 주제는 트랜스포비아였고 어쩌다보니 이게 강의 같은 느낌의 내용이 되었다. 다행이라면 진오 님과 내가 치고 받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게 꽤나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야기가 이렇게 잘 이어지다니! 진오 님이 무척 재밌게 말씀하셔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하지만 역시나 내용은 강의 같은 그런 내용이 되었고, 듣는 분들은 졸리겠지… 라디오 퀴어 강좌도 아니고…
(퀴어락 활동이 좀 안정되고 학위논문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퀴어이론 팟캐스트라도 해볼까나..라고 망상하지만 이게 보통 일이 아닌 관계로 가볍게 포기! 흐흐흐)

그나저나 퀴어락에선 장기적으로 음원 아카이브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오늘 녹음한 방송 뿐만 아니라 퀴어방송 등 여러 팟캐스트의 음원을 수집해야 하는데, 이게 또 일이구나…


슬픈 사진, 퀴어의 역사와 기록물

세 개의 박스가 쌓여 있는 이 사진은 최근에 받은 택배 박스다. 개봉은 했지만 아직 내용물을 제대로 정리 못 한 상태로 방치하고 있는 이 박스엔 1990년대 중반 즈음부터 1970년대 즈음까지, 한국 퀴어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는 기록물(자료)이 들어있다. 물론 퀴어와 무관한 기록물도 있고 2000년대 기록물도 있지만 아무려나 그러하다.
인터넷이 성소수자에게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한 1990년대 중반의 한국 기사도 있고, 1980년대 변태 문화를 다룬 글도 있고, 1990년대 초반 동성애의 위험을 경고하는 기독교 문서도 있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있다. 그 당시엔 단발성으로 끝났을 법한 글이지만 지금에 와선 무척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이것이 내게 슬픈 사진인 이유는 어쩐지 올해 들어 계속 분주하고 바빠서 이 박스를 제대로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다. 당연히 내용을 제대로 살필 여유도 없다. 에휴… 다음 주에나 좀 정신을 차릴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