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사진, 퀴어의 역사와 기록물

세 개의 박스가 쌓여 있는 이 사진은 최근에 받은 택배 박스다. 개봉은 했지만 아직 내용물을 제대로 정리 못 한 상태로 방치하고 있는 이 박스엔 1990년대 중반 즈음부터 1970년대 즈음까지, 한국 퀴어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는 기록물(자료)이 들어있다. 물론 퀴어와 무관한 기록물도 있고 2000년대 기록물도 있지만 아무려나 그러하다.
인터넷이 성소수자에게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한 1990년대 중반의 한국 기사도 있고, 1980년대 변태 문화를 다룬 글도 있고, 1990년대 초반 동성애의 위험을 경고하는 기독교 문서도 있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있다. 그 당시엔 단발성으로 끝났을 법한 글이지만 지금에 와선 무척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이것이 내게 슬픈 사진인 이유는 어쩐지 올해 들어 계속 분주하고 바빠서 이 박스를 제대로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다. 당연히 내용을 제대로 살필 여유도 없다. 에휴… 다음 주에나 좀 정신을 차릴 수 있으려나.

혐오/증오의 목격자

어쩌면 마지막 쪽글입니다!
그나저나 어째서인지 년초부터 엄청 정신이 없는 일정이네요. 왜이러는 건지..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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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0.수. 김영옥 선생님. 폭력문화비판과 감정의 정치학.
혐오/증오의 목격자
-루인
어린 아이를 목에 태우고서 동성애를 증오하는 사람들을 잠시 구경했다. 11월 마지막 금요일 밤, 시청 앞에 모여 있는 “반동성애” 집단, 혹은 HIV/AIDS 혐오를 밑절미 삼은 반-LGBT/퀴어 집단을 구경하러 갔다가 본 풍경이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문득 저 아이는 이런 환경에서 어떤 감정을 배우며 성장할까 궁금했다. ‘아이는 우리의 미래며 동성애자는 아이에게 해를 끼치고 미래를 망치는 위험한 존재’라고 주장하며 강한 분노와 혐오를 표출하는 곳, 때때로 방언이 터지면서 온갖 증오의 말을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곳에서 아이는 어떤 정서를 형성할까, 궁금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저 아이는 증오와 혐오를 표출하는 부모의 증인으로 그곳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추운날 ‘아이’라는 상징성을 위해 동원된 것일까, 증오/혐오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것일까? 저 아이가 비이성애자거나 트랜스젠더일 수도 있음을 가정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으면서, 그저 부모는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 아이를 추운 밤에 데려 나왔던 것일까?
다른 한편 그 며칠 후 박원순 서울시장은 ‘성전환자는 지지하지만 동성애자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통해 다양한 집단의 분노를 자아냈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지지에서 명백하게 배제된 동성애 집단, 논의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비가시화된 바이/양성애 및 다른 여러 비이성애 집단이 분노를 표출했다. 뿐만 아니라 지지의 대상에 올랐던 ‘성전환자’ 혹은 트랜스젠더 당사자들 역시 분노했다. 박원순의 발언은 트랜스젠더를 지지하는 발언이 아니라 명백하게 모욕하고 우아하게 혹은 저열하게 혐오하는 언설이기 때문이다.
박원순이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임원과의 간담회에서 ‘성전환자’를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어떤 이해도 없음을 의미한다. ‘동성애자는 HIV/AIDS 혐오를 밑절미 삼은 혐오의 대상’이라는 어떤 ‘이미지’가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에겐 이와 같은 혐오의 이미지는 구성되어 있지 않은데 이것은 긍정적 현상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의 이미지, 주로 소비되는 형상은 ‘진짜 여자’ 혹은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다. 그리하여 이원 젠더 체제를 조금도 흔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원 젠더 체제를 입증하는 존재며 어떻게든 ‘정상적으로’ 살고자 하는 존재다. 즉 트랜스젠더는 불쌍한 존재로만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한기총이 지지 성명서를 내고,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임원들이 ‘성전환자는 지지한다’는 박원순의 말에 그냥 넘어간 것은 한기총과 박원순 모두 이런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박원순은 트랜스젠더의 구체적인 삶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수준, 인권 개념 없이도 말 할 수 있는 딱 그 수준에서 ‘지지’ 발언을 한 것이다. 즉, 그의 발언은 트랜스젠더를 불쌍한 대상으로 타자화한 것이며 지지의 형식을 통한 혐오 발화다. (그저 불쌍해서 ‘지지’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된 트랜스젠더는 한국 사회에서 혐오 폭력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존재기도 하다.)
박원순의 발화를 사라 아흐메드(Sara Ahmed)의 논의로 다시 설명한다면, 혐오/증오와 같은 감정 역시 개인에 내재한 본질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발생한 것이란 점이다. 박원순과 한기총 등의 발언은 어떤 집단엔 지지하지 않음을 표하고(혹은 공공연한 혐오를 표하고), 어떤 집단엔 지지하는 몸짓을 취하고, 어떤 집단은 아예 논의에서 완전히 삭제할지를 선별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혐오의 표출은 HIV/AIDS 혐오를 밑절미 삼은 또 다른 사회문화적 혹은 정치적 감정을 자연화하며 정당화하고 있다. ‘지지’ 발화는 한기총 등 “반동성애(!)” 집단의 공공연한 언설에 근거하여 잠시 비껴난 것과 함께 사유해야 한다(그렇다고 이들이 트랜스젠더에 우호적이냐면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고 바이/양성애 등 비이성애-비동성애 집단의 완전한 배제/은폐는 ‘반동성애’ 집단과 일부 동성애자의 바이 혐오를 공유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애자, 비이성애-비동성애자, 트랜스젠더가 각각 처한 다른 사회문화적 구조는 각 집단의 몸을 형상하는데 영향을 끼친다. 모든 혐오와 논의가 동성애로 전유될 뿐만 아니라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박원순의 발언으로 동성애자의 발언은 더욱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았고 현재 이슈는 동성애 이슈로 오독되기 쉽게 되었다. 혐오발화임에도 ‘지지’처럼 독해되는 박원순의 발언으로 트랜스젠더의 발언은 동성애자 지지발언으로 독해되기도 하고, 다양한 성적 지향을 가진 트랜스젠더의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계기로 독해되기도 한다(레즈비언 트랜스젠더는 지지하는 것일까 지지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바이/양성애자 등 다른 성적지향은? 어디에도 위치를 잡기 어렵다. 여전히 희미한 몸으로, 마치 유령 같은 존재로 떠돌아야 한다. 끊임없이 존재를 주장하지만 존재를 주장하는 것만이 의미 있는 일인 것처럼 떠도는 유령 말이다. 이것이 앞으로 어떤 정동을 만들고, 어떤 감정의 역사를 만들지는 시간이 지나야 가늠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슬픔을 내 몸의 일부로 만들 뿐이다.
다시, 앞의 아이 이야기로 돌아가자. 온갖 증오, 비난, 혐오로 자신의 몸을 만들고 있는 사람(아마도 아버지?)의 목에 앉아 있던 아이가, 만약 아흐메드가 중요하게 지적했듯 감정의 목격자라면 무엇을 어떻게 목격하고 있을까? 그 아이는 증오를 자신의 몸으로 만들고 있을까, 증오의 기운에 따른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만들고 있을까? 그런데 적어도 서울시에선 가장 가치 있는 발언,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는 발언으로 평가되는 혐오 발화가 가득한 그 풍경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이성애-이원 젠더 체제의 은폐다. “성적 지향과 성별정체성”이란 구절을 둘러싼 논의에서 가장 첨예하게 논의해야 함에도 이성애-이원 젠더 체제는 별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이성애, 비트랜스젠더는 자연스럽다는 인식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강화된다. 이성애-이원 젠더 체제가 논의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혐오, 증오 같은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이거나 ‘미래를 걱정’하는 매우 합리적인 판단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으로만 말해지는 것은 아닐는지. 구조를 알고 말한다고 해서 이번 일로 내가 받는 어떤 상처가 무뎌지거나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겪고 있는 상처가 욱신거리는 만큼 더욱 열심히 증오가 생성되는 구조, 그리고 증오가 내게 하는 일을 말해야만 조금은 다른 식으로 말하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쪽글] 나를 멸시하는 당신의 얼굴, 두려움의 피부

이제 쪽글은 거의 다 소진했으니.. 곧 다시 제대로 블로깅인가…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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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6. 목. 14:00-17:00. 폭력문화비판과 감정의 정치학.
나를 멸시하는 당신의 얼굴, 두려움의 피부
-루인
캐서린 러츠(Catherine A. Lutz)와 릴라 아부-루고드(Lila Abu-Lughod)는 정서(emotion)가 사회문화적 구성이란 측면을 강조하며 담론에 대한 정서(emotion on discourse), 정서적 담론(emotional discourse)를 논의한다. 둘은 정서를 이해하는 방식을 네 가지, 즉 본질화(2-3), 상대화(3-5), 역사화(5-6), 그리고 맥락화 혹은 담론으로서 정서(6-10)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이를 통해 아부-루고드와 러츠는 정서를 개인에 내재하는 본성 같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에 관한 것”(1), “담론적 실천”(10)으로 재설정한다. 비록 정서가 개인적 혹은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측면이 존재하며 이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리고 체화하는 감정을 논하지만, 둘은 정서가 내적 본질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구성이란 측면에서 다루고자 한다. 이것이 그 당시의 맥락에서 필요했던 논의였는지도 모른다.
아부-루고드와 러츠가 편집한 책이 나오고 14년 가량의 시간이 지나, 정동(affect), 정서, 감정(feeling) 등을 둘러싼 논의가 어느 정도 쌓인 시점에서 사라 아흐메드(Sara Ahmed)는 정서가 본질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구성이란 측면을 논하는데 힘을 쏟는 대신, 정서가 어떻게 몸을 형상(shape)하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정서가 개인에 내재했다가 외부로 표출/이동한다거나(“inside out model”), 군중의 감정이 개인에게로 흐른다는 식의 논의(“outside in model”)는 모두 정서가 이미 존재하는 것, 개인이나 집단이 소유한 것으로 가정한다. 또한 정서를 사회문화적 실천으로 설명할 때 이러한 설명은 그 의도가 무관하게 정서를 개인의 몸에서 분리시키곤 한다. 이것은 아부-루고드와 러츠가 끊임없이 경계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정서의 사회성(sociality)을 제안하는(Ahmed, 9) 아흐메드는 정서가 대상 및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 어떻게 몸의 표면과 경계를 형상하는지, 접촉을 통해 형상된 것을 어떻게 취하는지를 탐문한다. 즉, 아흐메드의 논점은 ‘정서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정서는 무엇을 하는가’이며(4), 접촉을 통해 정서가 어떻게 표면과 경계를 형상하는가다.
그렇다면 내 감정은 내 피부를 어떻게 형상할까? 어떤 접촉에서 어떤 감정이 내 피부를 형상하도록 작동하고, 어떤 접촉에서 나는 어떤 감정의 피부를 취할까? 도미야마 이치로는 『폭력의 예감』에서 두려움과 폭력을 예감하는 감정이 구성하는 몸의 표면과 경계, 글의 몸[文體]을 논했다. 그리하여 도미야마의 작업은 폭력과 감정의 교차지점을 살피는 사유기도 하다. 다른 말로 내 피부를 형상하는 감정을 독해하는 작업은 내 몸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감정의 피부가 이 사회에서 어떤 이론적 맥락에 위치하는지를 사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Abu-Lughod & Lutz, 13), “접촉 지대로서의 아카이브”(Ahmed, 14)인 피부를 살피는 작업이다.
다소 얌전하고 평범하게 생겨서 매우 ‘규범’적 피부로 살고 있는 내가 근래 들어 빈번하게 듣는 말은 “아유, 여자인 줄 알았어요”다(그래서 지금은 무엇으로 알고 있다는 것일까?). 특히 알바하는 곳에서, 예전에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날 때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혼잡한 점심시간의 식당에선 때때로 “아가씨, 음식 나왔어요”란 말을 듣기도 한다. 공공연히 혹은 선별적으로 mtf 트랜스젠더라고 말하거나 글을 쓰는 내게 ‘여성’으로 인식되는 찰나는 즐거운 순간일 수 있다. 실제 나는 그런 반응을 들으면 빙긋 웃으며 몸이 말랑해지는 것을 느낀다. ‘남성’으로 더 많이 통과되는 상황에 상당한 불편과 갈등을 느끼기에 ‘여성’으로 인식되는 찰나는 분명 즐거운 순간이다. 내가 ‘남성’으로 인식되면 안 되기 때문에 ‘여성’으로 통하는 시간이 즐거운 것이 아니다. 나는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며, 남성도 여성도 아닌 트랜스젠더로 나를 범주화하기에 때때로 누군가가 나를 ‘남성’으로 인지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너무 많은 순간에 ‘남성’으로만 통해서 갈등이 발생한다(이런 이유로 나를 ‘남성’으로 분류하는 인식이 상당히 불쾌하다). 그러니 (짧은 순간이나마) 나를 여성젠더로 인식하는 이들과 접촉하는 순간, 보잘것 없는 내 몸으로 어떤 교란의 가능성을 만들었다는 기쁨에 표정이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그 순간 나의 몸은 이원 젠더 규범을 한순간이나마 교란할 가능성을 지닌 몸으로 변한다.
하지만 여성으로도 남성으로도 통하지 않고 모호한 젠더로 통하길 원하는 트랜스젠더인 나는 ‘여성’으로 독해되는 순간이 즐겁지만은 않다. 이렇게 나와 상대가 접촉하는 순간, 나는 빙긋 웃으면서 부드러워지지만 또한 내 몸은 굳어간다. 굳어가는 몸은 상대가 나를 ‘여성’으로 독해하는 방식으로 접촉하면서 생긴 사건인 동시에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이 깊숙하게 개입하고 또 그 얼굴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나는 트랜스젠더로 통하는데 확하거나 성공하지 못한다. 실패 혹은 성공하지 못함은 나가 기획하는 세계와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겹쳐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건,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인식론에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내 몸은 충돌하는 규범이 공존하면서 형상을 갖춘다. 충돌하는 규범이 내 몸에 수집되고 등록된다(archive).
그런데 나를 적대하거나 멸시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는 상대방의 얼굴을 먼저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여성인 줄 알았다’고 웃으며 말하는 반응보다, 나를 적대하고 멸시하는 표정으로 보는 얼굴이 때때로 좀 더 편하다. 적대적인 표정으로 나를 보거나, 멸시하는 감정을 담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상대와 접촉하며, 내 몸은 좀 더 느긋해진다. 멸시하는 반응은 그가 체화하며 살고 있는 젠더 규범과 그에  따른 규범적 감정 표현으로 우리의 접촉을 형상한 것이자, 우리가 접촉하는 순간에 그의 몸과 내 몸을 재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니 그의 얼굴은 내 몸이다. 나를 보며 느끼는/해석하는 그 불쾌함, 불쾌함을 드러내는 얼굴의 표정이 내 몸의 형상이다. 멸시하는 상대의 표정이 내 피부다.
상대의 얼굴이 내 몸의 형상이라면, 그래, 우리 둘의 몸을 형상하는 또 다른 감정 중 하나는 두려움이다. 내가 상대방의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움(혹은 폭력의 예감)이 내 삶을 형상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굳이 그가 아니어도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수시로 느끼는 감정이다. 두려움. 혐오폭력은 우발적으로 발생하기보다 사전 기획에 따라 발생하는 경향이 있기에 물리적 폭력이 그리 쉽게 발생하지는 않음을 안다. 그럼에도 혐오폭력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내 몸이 더욱더 ‘모호한’ 젠더로 독해될 수록 그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두려움.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독해되는 ‘폭력’이 발생할 상황을 떠올리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가 덜 ‘모호한 젠더’일 수록 나는 젠더 해석의 폭력, 인식론적 폭력, (평범하다고 얘기하는)이성애규범적 대화의 폭력에 노출된다. 물론 이런 폭력은 내가 원하는 젠더로 인식될 때도 발생하지만 그 양상은 다르다. 그런데 나는 영원히 내가 원하는 방식의 젠더로 인식되지 못 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방식 자체가 끊임없이 변하고, 내가 타자 혹은 세상과 접촉하며 발생하는 감정은 내가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아직은 다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있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형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