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마지막 쪽글입니다!
그나저나 어째서인지 년초부터 엄청 정신이 없는 일정이네요. 왜이러는 건지..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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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0.수. 김영옥 선생님. 폭력문화비판과 감정의 정치학.
혐오/증오의 목격자
-루인
어린 아이를 목에 태우고서 동성애를 증오하는 사람들을 잠시 구경했다. 11월 마지막 금요일 밤, 시청 앞에 모여 있는 “반동성애” 집단, 혹은 HIV/AIDS 혐오를 밑절미 삼은 반-LGBT/퀴어 집단을 구경하러 갔다가 본 풍경이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문득 저 아이는 이런 환경에서 어떤 감정을 배우며 성장할까 궁금했다. ‘아이는 우리의 미래며 동성애자는 아이에게 해를 끼치고 미래를 망치는 위험한 존재’라고 주장하며 강한 분노와 혐오를 표출하는 곳, 때때로 방언이 터지면서 온갖 증오의 말을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곳에서 아이는 어떤 정서를 형성할까, 궁금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저 아이는 증오와 혐오를 표출하는 부모의 증인으로 그곳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추운날 ‘아이’라는 상징성을 위해 동원된 것일까, 증오/혐오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것일까? 저 아이가 비이성애자거나 트랜스젠더일 수도 있음을 가정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으면서, 그저 부모는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 아이를 추운 밤에 데려 나왔던 것일까?
다른 한편 그 며칠 후 박원순 서울시장은 ‘성전환자는 지지하지만 동성애자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통해 다양한 집단의 분노를 자아냈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지지에서 명백하게 배제된 동성애 집단, 논의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비가시화된 바이/양성애 및 다른 여러 비이성애 집단이 분노를 표출했다. 뿐만 아니라 지지의 대상에 올랐던 ‘성전환자’ 혹은 트랜스젠더 당사자들 역시 분노했다. 박원순의 발언은 트랜스젠더를 지지하는 발언이 아니라 명백하게 모욕하고 우아하게 혹은 저열하게 혐오하는 언설이기 때문이다.
박원순이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임원과의 간담회에서 ‘성전환자’를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어떤 이해도 없음을 의미한다. ‘동성애자는 HIV/AIDS 혐오를 밑절미 삼은 혐오의 대상’이라는 어떤 ‘이미지’가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에겐 이와 같은 혐오의 이미지는 구성되어 있지 않은데 이것은 긍정적 현상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의 이미지, 주로 소비되는 형상은 ‘진짜 여자’ 혹은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다. 그리하여 이원 젠더 체제를 조금도 흔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원 젠더 체제를 입증하는 존재며 어떻게든 ‘정상적으로’ 살고자 하는 존재다. 즉 트랜스젠더는 불쌍한 존재로만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한기총이 지지 성명서를 내고,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임원들이 ‘성전환자는 지지한다’는 박원순의 말에 그냥 넘어간 것은 한기총과 박원순 모두 이런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박원순은 트랜스젠더의 구체적인 삶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수준, 인권 개념 없이도 말 할 수 있는 딱 그 수준에서 ‘지지’ 발언을 한 것이다. 즉, 그의 발언은 트랜스젠더를 불쌍한 대상으로 타자화한 것이며 지지의 형식을 통한 혐오 발화다. (그저 불쌍해서 ‘지지’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된 트랜스젠더는 한국 사회에서 혐오 폭력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존재기도 하다.)
박원순의 발화를 사라 아흐메드(Sara Ahmed)의 논의로 다시 설명한다면, 혐오/증오와 같은 감정 역시 개인에 내재한 본질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발생한 것이란 점이다. 박원순과 한기총 등의 발언은 어떤 집단엔 지지하지 않음을 표하고(혹은 공공연한 혐오를 표하고), 어떤 집단엔 지지하는 몸짓을 취하고, 어떤 집단은 아예 논의에서 완전히 삭제할지를 선별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혐오의 표출은 HIV/AIDS 혐오를 밑절미 삼은 또 다른 사회문화적 혹은 정치적 감정을 자연화하며 정당화하고 있다. ‘지지’ 발화는 한기총 등 “반동성애(!)” 집단의 공공연한 언설에 근거하여 잠시 비껴난 것과 함께 사유해야 한다(그렇다고 이들이 트랜스젠더에 우호적이냐면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고 바이/양성애 등 비이성애-비동성애 집단의 완전한 배제/은폐는 ‘반동성애’ 집단과 일부 동성애자의 바이 혐오를 공유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애자, 비이성애-비동성애자, 트랜스젠더가 각각 처한 다른 사회문화적 구조는 각 집단의 몸을 형상하는데 영향을 끼친다. 모든 혐오와 논의가 동성애로 전유될 뿐만 아니라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박원순의 발언으로 동성애자의 발언은 더욱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았고 현재 이슈는 동성애 이슈로 오독되기 쉽게 되었다. 혐오발화임에도 ‘지지’처럼 독해되는 박원순의 발언으로 트랜스젠더의 발언은 동성애자 지지발언으로 독해되기도 하고, 다양한 성적 지향을 가진 트랜스젠더의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계기로 독해되기도 한다(레즈비언 트랜스젠더는 지지하는 것일까 지지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바이/양성애자 등 다른 성적지향은? 어디에도 위치를 잡기 어렵다. 여전히 희미한 몸으로, 마치 유령 같은 존재로 떠돌아야 한다. 끊임없이 존재를 주장하지만 존재를 주장하는 것만이 의미 있는 일인 것처럼 떠도는 유령 말이다. 이것이 앞으로 어떤 정동을 만들고, 어떤 감정의 역사를 만들지는 시간이 지나야 가늠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슬픔을 내 몸의 일부로 만들 뿐이다.
다시, 앞의 아이 이야기로 돌아가자. 온갖 증오, 비난, 혐오로 자신의 몸을 만들고 있는 사람(아마도 아버지?)의 목에 앉아 있던 아이가, 만약 아흐메드가 중요하게 지적했듯 감정의 목격자라면 무엇을 어떻게 목격하고 있을까? 그 아이는 증오를 자신의 몸으로 만들고 있을까, 증오의 기운에 따른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만들고 있을까? 그런데 적어도 서울시에선 가장 가치 있는 발언,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는 발언으로 평가되는 혐오 발화가 가득한 그 풍경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이성애-이원 젠더 체제의 은폐다. “성적 지향과 성별정체성”이란 구절을 둘러싼 논의에서 가장 첨예하게 논의해야 함에도 이성애-이원 젠더 체제는 별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이성애, 비트랜스젠더는 자연스럽다는 인식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강화된다. 이성애-이원 젠더 체제가 논의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혐오, 증오 같은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이거나 ‘미래를 걱정’하는 매우 합리적인 판단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으로만 말해지는 것은 아닐는지. 구조를 알고 말한다고 해서 이번 일로 내가 받는 어떤 상처가 무뎌지거나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겪고 있는 상처가 욱신거리는 만큼 더욱 열심히 증오가 생성되는 구조, 그리고 증오가 내게 하는 일을 말해야만 조금은 다른 식으로 말하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