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글] 두려움, 그리하여 폭력을 예감하며 쓰는 언어

도미야마 이치로를 만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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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30.목. 14:00-17:00. 폭력문화비판과 감정의 정치학.
두려움, 그리하여 폭력을 예감하며 쓰는 언어
-루인
“이하의 기술은 점령지의 말이다.”(161)
일본이 오키나와를 침략하며 폐번치헌한 역사적 사건을 두고 이하 후유가 “진화의 길”, “노예해방”이라고 했을 때(152), 이것은 얼핏 폐번치헌을 긍정하는 뉘앙스, 혹은 동화주의로 독해될 수 있다. 즉 침략자인 일본의 행위를 찬양하거나 긍정하고, 오키나와의 이전 정치체제 혹은 류큐국 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하 후유의 문구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얼핏 이런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이하 후유가 처한 위치를 무시한, 탈맥락적 독해다. 이하 후유의 언어는 “무장이라는 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언어행위”(27)다. 그리하여 이하의 저술 행위, 발화 행위는 “점령지의 말”(161)이다. 동료 혹은 동류의 사람들이 폭력 피해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거나,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로 변해가고 있는 모습을 망막에 새기고 있는 자의 언어(29-30)가 이하 후유의 기술이다.
오키나와 소학교의 한 교사는 “관동대지진 당시 표준어를 말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많은 조선인이 살해되었다. 너희들도 자칫 오인되어 살해당하는 일이 없도록”(26)이라고 말했다. 민예협회 회원들이 아와모리를 파는 한 선술집에 갔을 때, 가게주인에게서 오키나와와 관련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들이 “오키나와 사람이 아니라서 주인은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39). 이것은 도미야마 이치로가 반복해서 언급하는 ‘에피소드’ 혹은 ‘사건’이다. 이 두 가지는 이하가 류큐 혹은 오키나와와 관련해서 저술하는 일련의 행위와 어떤 상관이 있을까? 도미야마는 이들 행위에서 가장 먼저 감지해야 하는 것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절박감, 그리고 언어행위를 통해서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극한의 기대감”(27)이라고 지적한다. 교사와 가게 주인, 그리고 이하의 언어 행위는 스스로를 타자 혹은 제3자로 위치짓기 싫어서(이른바 ‘명예 일본인/주체’가 되고 싶어서) 다른 누군가를 제3자로 만드는 행위라기보다, ‘점령지의 피식민자가 하는 말’이며 폭력을 예감하는 언어 행위다. 그리하여 이들의 언어, 이하 후유의 저술에 깃들어 있는 것은 두려움이다. 두려움, 즉 폭력의 예감이 이들의 언어, 저술에 스며있고 이들의 삶을 구축한다.
두려움. 트랜스젠더 운동, 혹은 LGBT/퀴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나는 언제나 너무 무서워서, 두려워서 속으로 바들바들 떨며 운동에 참여하고 있고 집회에 나간다. LGBT/퀴어를 혐오하는 누군가가 언제든 나에게 위해(危害)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폭력을 예감하며 운동에 참여하기를 중단하지 못 한다. 두려워서 운동에 참여하고, 두려워서 운동에서 떠나지를 못 한다. 두려워서 이런저런 말을 떠들고 두려워서 통용할 수 있는 언어를 고민한다. 두려움은 내가 움직이는 동력이며 내가 삶을 버틸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하지만 이 두려움을 어떻게 맥락화할 수 있을까? 두려움으로 LGBT/퀴어의 삶과 언어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맥락화할 수 있을까? 두려움을 힘으로는 고민했지만 삶과 텍스트를 해석하는 분석틀로는 고민한 적 없는 내게, 두려움을 분석틀 삼아 이하 후유를 (재)해석하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언어는 내게 고통스러운 아름다움이다.
도미야마가 촘촘하게 밝히고 있듯, 근대 일본의 인류학 조사는 “징병제에 수반되는 국민의 신체측정과 실체 측정 작업 과정에서도 서로 겹쳐진다”(111). 일본인이라는 범주를 설명하고자 하는 일본 인류학의 작업은 신체 검사를 통해 키, 몸두게 등을 꼼꼼하게 측정하고 이를 국가에 등록하며 근대 국민국가, 위생국가, 그리고 군대국가를 구축하는데 함께 한다. 또한 일본인의 원류를 찾고자 하는 작업을 진행하며 아이누의 문화와 류큐의 문화, 아이인의 체형과 류큐인의 체형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유추한다. 이런 일련의 작업은 아이누와 류큐를 시간적 타자로 구성하고(128), 신체를 통계로 코드화한다(113). 그런데 여기서 도미야마가 주목하는 점은 “구축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증후학적 관찰이 계속 실패한다는 점”이다. 분류 작업, 혹은 범주를 구축하는 작업은 “분류가 불가능한 존재”, “분류를 무효화하고 자기동일성을 파괴하며 분류라는 방법으로는 수습할 수 없었던 잡다한 존재를 드러내는 계기”(119)를 마련한다. 이것은 증후학적 관찰의 실패를 입증하는 찰나일 뿐만 아니라 (관계에 있어) 제3자를 생성하는 순간이다. 이 실패는 범주(혹은 ‘일본인’) 구성의 자아동일성, 자아도취적 판타지가 위험에 봉착했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더욱더 관찰에 몰두하도록 한다(168-169).
근대 일본 인류학에서 류큐 문화의 정보제공자 역할을 했던 이하 후유는 류큐와 관련한 글을 쓰며 이하 자신이 제공한 정보로 구성된 일본 인류학자의 작업을 적극 인용한다. 그리고 일본 인류학의 목소리를 인용하며 류큐 문화, 류큐인을 설명한다. 이럴 때 이하가 빌린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명하지만, 이하에게도 앙금은 쌓여 있다(18-19). 비록 폭력을 예감하기에 직접 언급은 못 한다고 해도(161-162) 이하는 (앙금을 조심스럽게 풀어낼)다른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리고 이하는 “역사를 잃은 무언의 타자로서 ‘류큐인’이 설정되는 것도, 개화의 역사 속에서 ‘형식적으로 동화’되어 ‘류큐인’이 해소되어 버리는 것도 거부하면서 ‘개성’의 소생이라는 역사”(175)를 구축한다. 얼핏 이하는 동화주의자, 일본의 오키나와 침략을 적극 긍정하는 입장 같지만 점령지의 언어, 두려움의 언어란 점을 분석틀로 삼을 때 이하 후유의 언어는 결코 ‘빌린 언어/담론’으로는 포섭할 수 없는 다른 어떤 가능성으로 변한다.
두려움을 분석틀 삼아 점령지의 언어를 분석할 때 다른 어떤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면, 이것은 퀴어 운동과 정치에서도 어떤 상상력과 성찰을 제공하지는 않을까? 특히 클로젯의 언어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독해할 가능성을 제공하지는 않을까?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운동에 참여하는 나는, 커밍아웃을 대단한 권력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일군의 언설, 커밍아웃을 해야만 하는 과업처럼 이야기하는 일군의 언설을 들으며 복잡한 감정에 빠진다. 특히 이런 언설은 클로젯을 ‘나쁜’ 대척점으로 삼거나 ‘나쁘지’는 않아도 극적인 비교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뿐만 아니라 클로젯은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이 지배 규범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어떤 피해도 입지 않으려는 동화주의자로 취급되거나 ‘무임승차’하는 존재로 호명된다. 이럴 때 내 마음은 더 복잡하다. 커밍아웃을 하는 것은 용기며, 클로젯은 겁쟁이에 불과한 것을까? 폭력을 예감하며 언제나 두려움에 떨면서 이야기를 하는 나와 ‘겁쟁이’로 인식되는 클로젯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커밍아웃을 권력으로 인식하는 이들의 언어, 클로젯의 언어를 두려움을 분석틀 삼아 논할 때 어떤 다른 가능성이 생기지 않을까? 지배 규범에 포섭된 존재인 동시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아서 규범을 불안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규범을 흔드는 가능성, 혹은 이성애규범-커밍아웃-클로젯이라는 어떤 삼각 구도 자체를 다시 사유하도록 하는 가능성 말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커밍아웃을 권력화하는 언설이야 말로 퀴어를 특정 범주로 등록(제한, 규정)하는 언어로 기능하고, 가장 이성애규범적 언어에 가깝다고 해석할 가능성 말이다.

[쪽글] 규범의 얼굴을 후려치기

이틀 연속 쪽글을 올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ㅅ;
지젝, 버틀러 등의 폭력 논의를 밑절미 삼은 글이라, 사실 수업 맥락을 모르는 분이 읽기엔 꽤나 난감할 수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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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4.목. 14:00-17:00. 폭력문화비판과 감정의 정치학.
규범의 얼굴을 후려치기
-루인
자신의 이야기를 서사로 구성할 수 있고, ‘나’의 상대인 ‘너’를 지칭하며 발화할 수 있는 ‘나’/주체는 필연적으로 ‘너’/타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너’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나’, 혹은 ‘나’와의 관계, ‘나’를 준거틀로 삼는 자장에 존재하는 ‘너’라는 언술 방식은 ‘내’가 말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발화 방식은 주체-타자라는 이항 관계에서 주체의 형성을 설명하는 매우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다음을 질문할 수 있다. 타자는 어떻게 해서 타자로 구성되는가? 주체는 자기 진술을 할 수 있고, 타자는 주체의 거울 역할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타자 혹은 나 아닌 누군가가 주체의 타자로 소환되지는 않는다(내가 주체가 되기 위해 모든 사람을 나의 거울로 삼지는 않는다). 주체와 타자라는 이항 관계 구조를 구성하는 다른 무언가/누군가인 구성적 외부가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저도 모르게) 말하고, 김애령이 비판적으로 지적한 “은유로서 여성”이고, 슬라보예 지젝이 제3자, 무젤만 혹은 오드라덱 등으로 설명한 무언가다.
주디스 버틀러는 “내가 나와 동일시하는 이는 내가 아니며 이런 ‘나는 아님’이 동일시의 조건”(199)이라고 논했다. 버틀러가 ‘나는 아니지만 내가 동일시하는 혹은 동일시할 수 있는 존재’를 논할 때, 이것은 동시에 내가 동일시하지 못 하거나 동일시하지 않는 어떤 존재/집단을 가정한다. 그리고 내가 동일시하지 않거나 동일시를 못 하는 존재/집단은 타자일 수도 있고 제3의 무언가일 수도 있다. 주체 형성 혹은 인간성 형성의 삼항 구조에서 내가 동일시하지 않는 존재/집단은 타자와 제3자 모두이기 때문이다. 지젝은 타자성을 전적으로 찬양하는 레비나스가 타자성 논의에서 고려하지 못 한 것은 “모든 인간의 근저에 있는 동일성이 아니라 근본적인 “비인간적” 타자성 그 자체”라고 했다(255). 제3자를 직접 논하는 지젝은 제3자가 얼굴도 심연도 없는 존재며,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의 출발이나 신이 경유하는 공간/존재가 아닌 무언가라고 지적한다(233, 257).
주체와 타자라는 이항 대립을 구성하는 외부며, 주체는 말할 것도 없고 타자도 때때로 존재 자체를 외면하고 얼굴 없는 무언가로 제3자를 논할 때, 이 논의는 퀴어 정치학의 논쟁을 (새롭지는 않다고 해도)흥미롭게 살필 수 있는 어떤 지평을 제공한다. 이 논의를 통해 퀴어 정치의 많은 장면을 흥미롭게 다시 풀어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이성애규범성과 동성애규범성(그리고 아직은 논의의 수면에 떠오르지 않고 있는 트랜스규범성)을 둘러싼 논의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작년 가을 김조광수-김승환 커플이 동성결혼식을 올리며 동성 간 결혼 이슈를 제기했다. 동성 간 결혼 이슈는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적지 않은 시간에 걸쳐 논의가 축적된 것이고,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때론 유사한 형태로 동성 간 결혼/결합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동성 간 결혼 혹은 결합은 길다면 긴 역사를 지닌다. 아울러 적지 않는 동성 커플이 공개 행사로 결혼식을 올렸고, 어떤 커플은 관공서에 찾아가 혼인신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조광수-김승환은 이 모든 역사를 무시하며 마치 자신들이 국내 최초의 동성 결혼식을 올리는 것처럼 홍보했고, 동성애 인권 운동의 최전선에 선 존재로 자신들을 재현했다.
퀴어 정치, 퀴어 이론이 끊임없이 규범성을 문제 삼고, 끊임없는 불편을 야기하는 정이자 이론이라고 할 때, 나는 동성결혼 이슈가 이성애규범성을 문제 삼는 정치라고 이해하지 않는다. 물론 결혼을 이성 간의 관계로 규정하는 이성애규범성에서 동성 간 결혼은 대항 정치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기존의 질거(결혼 제도) 자체를 문제 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혼 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다양한 관계 지형을 배제하며 얼굴 없는 존재처럼 만든다. 하지만 현재의 동성결혼 논의가 문제인 것은 다른 많은 중요한 이슈를 은폐하거나 주변화시켜서만이 아니다. 또한 이 지점이 동성결혼을 동성애규범성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도 아니다. 현재의 동성결혼 이슈는 결혼을 둘러싼 LGBT/퀴어 공동체 내부의 복잡한 기류를 은폐한다. 동성애 커뮤니티 내부엔 바이/양성애자의 결혼을 향한 극심한 혐오가 존재한다. 그래서 바이는 결혼을 할 존재기에 (실제 결혼을 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바이란 이유만으로)배신자일 뿐만 아니라 결혼의 가능성은 바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결혼을 이유로 바이를 비난하는 이들 중 적지 않는 수가 동성결혼을 지지하고 합법화되길 원하고 있다. 트랜스젠더의 맥락에서, 동성결혼은 법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일이며, 실제 일부 트랜스젠더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동성결혼을 했다. 동성애자이기도 한 트랜스젠더 중 일부는 파트너와 합의 하에 자신의 호적 상 성별을 바꾸지 않고 합법적으로 동성결혼을 하며 결혼 제도, 이성애규범성 자체를 교란하고 있다. 혹은 합의 없이 동성결혼이 진행되기도 한다. LGBT/퀴어 공동체에선 결혼을 둘러싼 복잡한 지형이 펼쳐지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동성결혼 이슈는 이런 모든 것을 배제하며 하며 마치 없는 일처럼, 모르는 일처럼 다룬다. 이성결혼과 동성결혼이라는 관계에서 바이의 결혼 이슈, 트랜스젠더의 동성결혼 이슈는 제3자, 구성적 외부로 형성된다. 그리고 동성결혼이 동성애규범성인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단순히 중요한 이슈의 우선 순위를 규정하는 문제를 야기해서가 아니다. ‘공동체’에서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는 이들, 분명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없는 것처럼 완벽한 부재자로 만들 뿐만 아니라 이들의 목소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동성결혼 이슈가 동성애규범성이다.
지젝의 이웃/괴물 혹은 제3자의 논의를 읽으며, 나는 나의 이웃만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란 점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내가 누군가의 이웃, 괴물, 호근 제3자(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존재 자체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 범주의 어떤 측면은 누군가에게 그 자체로 폭력이고 위협이며, 얼굴 없고 심연 없는 부재다. 그렇다면 증언할 수도 없고 입장을 표명할 수도 없다(지젝 256)고 말하는 무젤만과 달리, 어쨌거나 증언하고 입장을 표명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항상 증언이나 입장으로 인식되지는 않는 그런 위치(타자와 제3자 사이 어딘가에 있는 위치)에서 나는 주체-타자의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까? 이것이 지젝의 논의를 퀴어하게 전유할 가능성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