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02.목. 14:00-17:00. 폭력문화비판과 감정의 정치학.
너와 나의 관계를 사유하는 힘, 혹은 상처와 슬픔과 폭력의 정치학
-루인
나와 신 사이에 네가 있다. 모든 것을 나의 고통으로 환원할 수 있고 내 위주로 설명할 수 있는 1인칭의 ‘나’와 마치 관조하듯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거리를 두고 말할 수 있는 3인칭의 ‘신’ 사이에 ‘너’가 있다. 너를 이야기하는 것은 너의 내면을 다 알고 있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너의 고민을 나의 고민과 등가로 만들지 않으려는 말하기인지도 모른다. 너를 이야기하는 것은 관조하듯 방관하듯 거리를 두며,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는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며, 마치 나와 무관한 사건을 전달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주디스 버틀러가 이야기하듯 ‘너’를 이야기하는 것은 “전 지구적 틀 안에서 일인칭 서사를 탈중심화 할 다른 의미, 다른 가능성”(버틀러, 30)일 수도 있다. ‘너’를 말하는 것은 이야기를 구술하는 화자인 ‘나’/‘신’과 이야기의 대상인 ‘너’ 사이의 관계, 그러니까 다 안다고 감히 말하지 않으면서,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란 점을 망각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식일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작가 한강이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동호를 ‘너’로 기술한 이유가 아닐까. 동호의 형이 한강에게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한강, 211. 이탤릭은 원문 그대로)라는 요청을 했을 때, 동호는 ‘나’가 될 수도 ‘그’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너’는 동호를 “모독”하지 않을 어떤 방편인지도 모른다.
폭력사건, 상처와 슬픔과 고통이 넘실거리는 사건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혹은 이런 사건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5•18 광주민주화운동, 4•16 세월호침몰참사사건, 혹은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퀴어/LGBT 혐오폭력/혐오살해 사건을 어떻게 재현하고 또 인식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이들 각 사건에서의 상처와 슬픔을 어떻게 사유하고 정치적인 것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이런 일련의 질문은 한강이 모색한 것이기도 하고 버틀러가 탐문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기억하는 수준에서(이런 이유로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공적으로 허여된 슬픔과 애도 행위, 특히 장례식장에서의 슬픔과 애도, 상주를 비롯한 유족의 슬픔과 애도는 어떤 ‘특별한’ 지위를 가졌다. 상주가 화를 내거나 깽판을 치는 것과 같은 일은 그리 보기 좋은 일은 아니라고 해도 일어나선 안 되거나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가 남성으로 통하는 조문객이거나 유족일 땐 특히 더 잘 허용되었다. 슬픔과 애도에도 예와 도가 있어 이를 지켜야 하지만 너무 슬퍼서, 애통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생긴 감정을 표출하는 한 가지 방법, 즉 ‘그럴 수도 있는 일’로 다뤄지던 때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무슨 사고를 쳐도 상주라고 하면 경찰도 적당한 말로 넘어가던 장면을 본 기억도 있다. 슬픔과 애도를 빌미로 발생하는 폭력이 정당할 수는 없겠지만 슬픔과 애도가 야기하는 어떤 또 다른 격한 감정과 그것의 표출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즉, 공적으로 허용된 혹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슬픔과 애도는 마치 공적 질서 혹은 법질서의 치외법권인 것처럼 질서를 어느 정도 무시하거나 위반하는 것이 가능한 때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어쩌면 슬픔과 애도라는 치외법권엔 법질서를 위협하고 권력의 질서를 흔들 어떤 가능성이 잠재해 있으며, 그것을 용인하는 할 수 있는 사회적 한계가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슬픔과 애도는 매우 위험한 행위다(이런 의미에서 우울증은 더 위험하다). 그래서일까? 3년을 요구하던 슬픔과 애도 행위는 49재로, 일주일 가량의 특별휴가로 점점 그것을 표출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버틀러는 “애도가 두려운 것이 될 때 우리의 두려움은 애도를 재빨리 해소할 욕구를 불러일으켜 상실을 회복하고 애도를 추방하려 할 것”(59)이라고 말했다. 정말로, 오래 슬퍼할 수 없고 서둘러 애도를 끝내라는 요구가 존재한다. 9•11 때 미국의 대통령 부시가 그랬다. 세월호침몰참사사건이 발생한 지금의 한국 사회가 그렇다. 슬픔과 애도가 두렵기라도 한지, 유가족에게 이제 그만 (슬퍼)할 것을 요구한다(혹은 비난한다). 세월호침몰참사로 소비가 줄어 경기가 침체했다는 언설이 ‘객관적 경제 분석’처럼 회자된다. 마치 4월 16일 이전에는 경기가 괜찮았다는 “판타지를 소생”(버틀러, 59) 시키려는 듯.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유족은 경찰의 감시 아래 슬픔과 애도 행위를 표출했고, 제주4•3사건에선 슬퍼하는 행위 자체가 금지되어 세칭 ‘아이고 사건’이 발생했다. 한 HIV/AIDS 감염인이 죽었을 땐 가족조차 장례식을 지낼 것을 거부했다. 어느 트랜스젠더가 겪은 폭력피해 경험은 공공연히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버틀러의 질문 “누가 인간으로 간주되는가, 누구의 삶이 삶으로 간주되는가, 끝으로 무엇이 애도할만한 삶으로 중요한가”(46, 원문 강조) 혹은 “어떤 종류의 주체가 애도되고 애도되어야 하며 어떤 종류의 주체가 애도되어서는 안 되는가”(15)는 국민의 조건, 시민의 조건, 그리하여 인간의 규범, 한계 그리고 조건을 탐문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슬픔과 애도 자체에 경기를 일으키며 격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어떤 집단의 태도는 슬픔과 애도 행위가 지배 규범적 질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어떤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것은 어떤 법질서, 어떤 지배 규범이 위협을 느끼는지가 드러나는 찰나기도 하고 지배 규범 혹은 법질서의 폭력적이면서 취약한 토대가 노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슬픔과 애도는 무력한 체념이 아니라(버틀러, 59) 그 자체로 강력한 저항 행위일 수 있다.
그래서 상처를 사유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폭력 피해를 겪었다는 것,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그에 따른 “고통의 출처와 꼭 연관이 없을지도 모르는 과녁을 향해 무제한적인 공격을 가할 수”(버틀러, 27) 있는 어떤 정당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상처를 성찰하고 그 매커니즘을 탐문하며, 누가 어떤 식으로 고통을 겪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버틀러, 12). 상처는 상처가 발생한 상황의 복잡한 권력 관계, 전지구적 사회 구조를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다른 말로 상처는 관계를 사유하는 일이며 관계의 장에 있는 타인을 어떻게 재현하고 인식할 것인가란 문제기도 하다. 그래서 ‘너’는 중요하다. 버틀러가 “2인칭으로 전달된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다면 전 지구적 권력이 취했던 형태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버틀러, 31)고 말했던 것도, 한강이 동호를 ‘너’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상대방이, 이웃이 혹은 타자/타인이 공포를 야기하는 낯선 무언가가 아니라 역사와 삶과 감정이 있는 사람이란 점을 인식한다면 폭력이 만연한 현재의 문화는 달라질 수도 있다. 고문이나 국가폭력은 광주시민, 세월호침몰참사의 유족, 아랍인, 퀴어/LGBT를 살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규범적 존재로, 적법한 구성원으로 인식하지 않기에 발생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를 인간으로, 감정이 있고 역사가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서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은 없을까? 친밀한 사적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국가폭력이나 전쟁과 같은 사건에서도 ‘너’가 목석인형이라서가 아니라 ‘너’에게 커다란 슬픔과 고통을 주기 위해서 폭력이 발생하는 측면이 있거나 공존한다면, 슬픔과 고통을 야기하는 것 자체가 폭력의 이유기도 하다면 관계성을 다시 사유해야 할 수도 있다. 한강과 버틀러를 읽으며 아직은 잘 정리가 되지 않는 나의 고민은 이 측면이다. 관계성과 인간 간의 의존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관계성과 의존성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고 바로 그래서 폭력이 발생한다면, 아니 바로 이런 이유로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면 폭력과 상처와 관계와 슬픔을 어떻게 다르게 사유할 수 있을까?